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가을 어느 날 영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일부 학생들이 과수원 사 과 따기 체험학습하러 다녀온 후 4교시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체험학습을 나가면 점심을 주로 김밥을 먹고 학교로 돌아온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학생들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방역지침을 따르기 위해 외부에서 식사하지 않고 학생들은 11시 30분에 들어왔다. 4교시가 11시 40분에 시작되는데 교과실에 한 학생이 오질 않았다. 조금 늦나 보다 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식이의 손에 빨갛게 잘 익은 아주 예쁜 사과 하나가 보였다. 수업을 시작하려고 학생들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살며시 오더니 먹음직스러운 예쁜 사과를 건네주며 말했다.
“선생님 드세요.”
“고마워. 그런데 이거 네가 땄으니 너 먹으렴.”
“아닙니다. 제거 교실에 있어요. 선생님 드세요.”
“나를 생각해서 이렇게 예쁜 사과를 갖다주어서 선생님이 감동하였어. 고마워!”
이전에 담임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정식이가 챙겨 주니 더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2021년 3월에 정식이를 충주 본교에서 처음 만났다. 교과 담당을 하면서 사회, 영어, 음악 교과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정식이가 하는 수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수어 실력이 짧은 내가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자기 말을 내가 못 알아들으니 정식이도 나처럼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교사인 내가 알면 정식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교과실로 들어와서 친구가 무섭다고 했다. 친구가 자기를 무시하고 혼낸다고 했다. 친구에게 그러지 않기로 약속하고 그때부터 둘이 어떻게 지내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교내에서 자존감 향상프로그램으로 심리 운동을 했을 때였다. 아주 큰 공을 굴리면서 어떤 사람을 공에 부딪치게 하는데, 아이들은 그 공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도망을 다녔다. 큰 소리로 웃으며 무척이나 그 활동을 좋아했다. 정식이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정식이 친구가 정식이의 등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친구를 조용히 불렀다. 자신의 행동이 어땠는지 생각하게 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친구는 정식이에게 사과를 했다. 어쩌면 그때 내가 한 행동이 무척 고마워서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5학년 학기 초에는 정식이가 영어 공부가 어렵다고 말하면서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랬던 정식이는 학기 말이 되었을 때 영어 발음기호를 보고 읽을 줄도 알게 될 정도로 많은 향상이 있었다. 배웠던 영어 낱말을 보고 읽기도 하고, 많이 접했던 말 중에서 간단한 것은 혼자 쓰기도 했다. 정식이가 자신감을 가지고 조금씩 성장해 가는 정식이를 보면서 보람도 느꼈던 시간이었다.
2020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초유의 사태가 빚어져 역사상 3월 개학이 연기된 그해의 일이다. 원격수업이 이루어졌고, 등교수업이 5월 27일이었지만 보미는 건강이 좋지 않아 가정체험학습으로 집에서 생활했다. 여름방학까지 집에서 보내고 9월 7일 처음으로 학교에서 보미를 만났다. 약간 까칠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모든 교과가 다 1학기 내용을 배워야 2학기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만, 수학은 특히 더 그렇다. 1학기 교과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2학기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1학기 수학을 점심시간을 통해 열심히 배우는 것과 일기를 매일매일 씀으로써 문장 실력을 쌓아가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1학기 수학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풀고 있는 문제가 어렵니?"
"예. 어려워요."
"그럼 어떡할까? 이걸 배우지 않으면 2학기 수학 책을 배울 수가 없는데. 이 단원 말고 다른 단원 공부할까?"
"........"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하자. 수고했어."
다음 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해서 1학기 수학 책을 다 배웠다.
국어 시간에 '내 마음을 전달하기'라는 주제로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사람에게 쪽지를 써서 직접 전해주기로 했다. 보미는 쪽지를 나에게 갖다주었다. 쪽지를 열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 1학기 수학 혼자 배울 때 어려워서 힘들었어요. 그때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몇 년 전에 이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올해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해야 해. 안 하면 안 돼”라고 강압적으로 시켰을 거야. 요즘 최대한 학생의 마음을 읽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일방적이기보다는 학생에게 되도록 선택권을 주게 한다. 이를테면
" 수학 문제 이거 풀어오는 것과 국어 쓰기 숙제랑 어느 것을 하고 싶니? "라고 물으면 학생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학생이 선택한 것을 존중해 주면 학생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기쁘게 책임을 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학습법이 더 낫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지금은 수학 진도를 다 나갔기 때문에 종합문제집을 단원별로 풀었다. 처음엔 좀 어려워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는 스스로 풀어보고 모르면 나에게 질문하라고 했다. 수학을 싫어하고 자신 없어 하던 보미는 가끔 나에게 어떻게 푸느냐고 물어온다. 그럴 때 난 기분이 참 좋다. 모르는 부분을 설명해 주면 금세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미소를 띠는 보미를 보았다. 수학 시간에 내가 즐겨 해 주던 말이다.
“모르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야, 물어보면 돼. 모르는데 아는 척 넘어가면 너만 손해야. 정답을 맞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가 더 중요해. 그러니 숙제할 때 다른 사람한테 정답을 묻는 것보다 문제를 풀지 않은 채 가져와서 나에게 물으면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지를 알고 너를 도와줄 수 있으므로 네가 숙제 한 그대로 가져오면 된단다.”
2022년 봄 아침에 출근해 보니 책상 위에 휴지로 무엇이 덮여 있었다.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전날 방과 후 요리반에서 만든 빵 종류일 거 같았다. 살짝 열어보니 짐작 대로였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재치 있게 두었을까 궁금했다. 이것 또한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마다 물어보았다.
“이거, 혹 네가 갖다 두었니?”
“아니요. 보미가 갖다 둔 거예요.” 보미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미야, 이거 네가 갖다 놓았니?”
“예.”
“우와! 너 센스 만점이야. 고마워.”
“센스가 무슨 뜻이에요?”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잘 이해할까 잠시 머뭇거리다 보미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나 나름으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센스란 ....”
그제야 보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선생님, 어제 안 계시던데 어디 가셨어요?”
“음, 너희들이 다음 달에 체험학습 갈 곳 답사 갔단다.”
평상시 그 시간에 만든 빵을 가져오면 늘 교실에 있었는데 전날은 출장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 교실에 마땅한 접시는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휴지로 먼지 들어가지 않게 살포시 덮어놓은 친구의 마음이 너무 이뻤다. 그래서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에다 칭찬하는 글을 써 주었다. 보미의 행동에 감동하였다고 하면서 칭찬을 아주 많이 해 주었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감동한 나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