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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혜문정(慧文庭)에서

[수필]



이제 이 현판은 더 많은 사람과 만나
 행복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혜문정, 이곳은 그 어린 날
내 작은 동굴의 원형이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우리 자매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외가댁을 향했다. 남해대교를 지나 어렵게 외가 동네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심장이 큰 북소리를 냈다. 지금부터 펼쳐질 이 모험의 시간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외가의 뒷산은 동네 사람들 노동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확실한 놀이터였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마을 뒷산과 마을 앞의 바다를 번갈아 가며 뛰어다녔다. 산과 바다를 모두 끼고 있는 곳이라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날은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다 말고 일어나 아이들에게 뒷산 동굴에 가자고 했다. 거기라면 바람의 소리를 더 크게, 더 가까이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이들은 꽁무니를 쳤다. 바람이 너무 세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 동네 아이들마저도 그렇게 말했을 정도이니 어지간한 바람이었나보다. 


  나는 주저 없이 혼자 올라갔다. 이 바람 부는 날, 혼자 뒷산을 차지하리라는 소유의 기쁨이 컸다. 산에서 가장 큰 동굴 옆으로 여러 작은 동굴들이 있었다. 평소에 와 보지 못했던 작은 공간이 작아서 더 아늑해 보였다. 큰 동굴보다 바람의 피해는 적을 것이면서도 동굴바닥은 풀밭이어서 여러 여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늑한 공간이 주는 행복감을 알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순 없지만 소중한 친구 두셋과 함께 라면 얼마든 지낼 수 있는 그 작은 동굴. 누구나 드나드는 대형동굴이 제공해줄 수 없는 아늑함과 포근함이 감도는 이 동굴에서 친구들과 비밀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동굴의 이름을 지었고 그때부터 수시로 이 동굴을 드나들며 가꾸었다. 풀이 우거진 동굴은 여름에 뱀이 많이 들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항상 풀밭을 살폈다. 


  매일 외할머니한테 주먹밥을 싸 달래서 혼자 산을 올랐다. 나는 최초의 공동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손님들이 오면 어디에 앉도록 해야겠고 들어오는 문을 어떻게 만들어야겠고 바닥을 어떻게 푹신하게 만들까 고민하며 하루를 거뜬히 보냈다. 아이들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고 나는 늘 알 거 없다며 퉁소리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얼마나 마음으로 외쳤던가.


  ‘곧 내 아지트에 너희를 초대하마, 기다려라!’      


  몇십 년 후, 나는 언젠가 완전체를 이룰 그 아지트를 위해 현판을 제작했다. ‘혜문정(慧文庭)’이라는 은행나무현판은 감격스럽게 내 앞에 꿈처럼 현실이 되었다. 

  지혜로운 글을 쓰는 시인이 되라는 뜻과 어린이들의 교육에 있어 슬기로운 구멍을 뚫어주라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심혜두(文心慧竇)’의 뜻을 이어받아 충만한 삶을 살아가라고 스승이 내려주신 아호(雅號) ‘혜문(慧文)’에다 이 세상의 모든 곳이 교실이라는 의미로 뜰 ‘정(庭)’을 붙여 만든 교육과 문학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학생들이 와서 함께 책을 읽고 여행 계획을 짜고 운동이나 특별 야외수업 준비하거나 밥을 먹고 숙박하기도 한다. 학교 교실이라는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것이 공부의 장(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6년 처음 원룸에서 시작해 제1혜문정, 2017년 투룸으로 옮겨 와 제2혜문정, 2020년에는 방 세 칸짜리 아파트로 입주하며 제3혜문정이 재탄생했다. 

  이후, 도심 한가운데 주택 이층의 안정된 공간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제4혜문정을, 2023년에는 앙증스럽고 실용성 있는 제5혜문정으로 이동했다. 이 공간은 늘 그랬듯 우리 모두의 아지트이다. 

  방 한 칸씩 늘려가는 것도 내게는 큰 감격이고 학생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을 지속해서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흐뭇하다. 


  어린 날, 그 조그만 동굴을 만들어 손님을 맞이하려 했던 꿈이 이제야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지어 부르던 동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동굴 입구에 글씨를 써놓고 들락날락하면서 그 이름을 눈에 새길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 이름을 오래오래 기억했을 텐데.    

 

  귀한 분들이 지어주고 인연 깊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 혜문정, 이 현판은 매일 아침에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꿰뚫어 본다. 이제 이 현판은 더 많은 사람과 만나 행복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혜문정, 이곳은 그 어린 날 내 작은 동굴의 원형이다.  






어린 날, 그 조그만 동굴을 만들어 손님을 맞이하려 했던
꿈이 이제야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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