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빨리 끊어왔을까

CPTSD, 관계의 차단 전략, 그리고 요구를 연습하지 못한 자리

by 민진성 mola mola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에 관한 문헌을 읽다 보면 이런 설명을 마주하게 된다. 관계와 정체성의 혼란, 권리와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요구하지 못하는 경향, 무질서한 관계에 쉽게 연루됨. 그런데 이 설명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나는 오히려 반대였기 때문이다. 권리나 필요를 요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기미가 보이면 애초에 가까워지지 않거나, 아주 이른 시점에서 관계를 끊어왔다. 이건 문헌에서 말하는 모습과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건 역방향 아닌가?



끌려다니는 관계는 아니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 패턴은 관계에 끌려다니는 모습과는 다르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하고 버티는 상태, 상대에게 맞추며 연루되는 상태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주도권은 나에게 있었다. 가까워질지 말지를 초기에 판단했고, 위험해 보이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진다. “그럼 나는 왜 이 설명에 포함되는 걸까?”



핵심은 ‘언제 끊었느냐’가 아니라 ‘왜 끊었느냐’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안의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른 단절이 건강한 경계 설정이다. 이 관계에서는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없다는 판단, 굳이 맞지 않는 관계를 선택하지 않는 성숙한 선택.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이른 단절이 요구를 피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요구하면 위험해질 것 같다는 자동 반응, 조율이나 갈등이 가능한지 확인하기도 전에 관계를 종료하는 방식.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요구해야 하는 장면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역방향이 아니라 다른 쪽 극단이다

CPTSD의 관계 패턴을 하나의 선으로 그리면 이렇게 나눌 수 있다. 한쪽 끝에는 불편해도 끊지 못하는 과잉 연루가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불편해질 기미가 보이면 미리 끊는 과잉 차단이 있다. 문헌은 주로 앞쪽을 다룬다. 하지만 뒤쪽 역시 같은 구조의 다른 변주다. 두 극단의 공통점은 하나다. 요구하고 조율하는 중간 지대를 거의 밟지 않는다는 것.



내가 제거해온 것은 관계였을까, 장면이었을까

돌아보면, 나는 권리와 필요를 포기한 사람이기보다는 권리와 필요가 시험대에 오를 장면 자체를 아주 이르게 제거해온 사람에 가깝다. 이건 약점이라기보다 위험한 환경에서 형성된 고급 생존 전략이다. 요구는 위험했고, 관계는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남는 질문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관계를 끊어야 할 때 끊었는가, 아니면 요구해도 괜찮다는 경험을 해볼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요구해도 관계가 유지되는 경험, 불편함을 말해도 존중받는 경험, 경계를 세워도 관계가 깊어지는 경험. 이런 장면들이 내 관계 역사 안에 얼마나 존재했는지를 묻게 된다.


나는 너무 빨리 끊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전략을 버리느냐가 아니라, 필요할 때 다른 선택지도 쓸 수 있느냐다. 끊지 않고, 요구해보고, 조율해보는 관계. 이건 위험한 도전이 아니라 관계 발달의 다음 단계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나는 예전과 다른 자리에 서 있다는 증거다.




#생각번호202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