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내가 살지 않을 집을 사면 화를 낼까?
당신은 미래에 살고 싶은 동네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일 때문에, 여건 때문에 다른 곳에 살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살지는 않지만 언젠가 살 집’을 미리 사둔다. 그건 생애 계획이고, 전략이다. 그런데 국가는 묻는다. “왜 안 살면서 샀죠?” 그리고 당신은 ‘투기꾼’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거주’란 누구의 판단으로 정의되는가?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 살 수 있는 권리는 언제부터 국가가 허락하는 권한이 되었는가?
최근 수년간 한국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사는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구조를 강화해왔다. 정책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비거주자에 대한 양도세·종부세 중과, 다주택자의 대출 제한, 임대사업자 제도의 단계적 폐지, 1주택 실거주자에게만 공급과 세제 혜택 집중. 이 흐름은 명확한 윤리적 선긋기를 내포하고 있다. “집은 쓰는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쓰지 않으면서 소유하면, 너는 공공재를 점유한 것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매우 강한 윤리적 환원주의가 숨어 있다.
‘투기’와 ‘투자’는 종종 같은 단어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투기는 순전히 가격 차익만을 노리고 단기적으로 시장을 흔드는 행위다. 반면 투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또는 어떤 시스템의 가능성을 믿고 자본을 묻는 행위다. 그 차이를 무시하는 순간, 우리는 생애 전략까지 금지당한다. 예컨대 나는 10년 후 은퇴 후 살고 싶은 동네가 있다. 그곳의 집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나는 지금 거기 살 수는 없지만, 그 공간에 나의 ‘미래 시간’을 담아둔다. 그건 자산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그 모든 행위를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 덮는다. “지금 안 살면, 사지 마세요.” 이건 단순한 시장 통제가 아니다. 삶의 기획을 불허하는 행위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현재 한국의 부동산 정책은 삶의 시간 구조마저 정의하려 한다는 점이다. 집은 지금 살 거면 사라. 미래를 위한 준비는 시장 교란이다. 살아야 ‘실수요’고, 나머지는 불순하다. 이건 단지 자산 관리가 아니다. 시간을 관리하려는 정치의 개입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지금은 강서구에 살지만, 언젠가는 반포에 살고 싶을 수 있다. 지금은 부모님과 살지만, 내년에 독립할 계획일 수 있다. 지금은 돈이 있어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소유만’ 할 수 있다. 그 모든 설계를 부정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권력이다.
진짜 ‘사유재산’이란 사용 여부와 무관하게 인정되는 권리다. 실거주 중심 정책이 일시적 공급 조절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조가 고착되면, 국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정답을 강요하는 체제로 변질된다. 집은 단지 현재의 거주지가 아니다. 집은 기억이고, 설계이고, 방향이다. 그것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 하나로 잘라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부동산 정책이 가진 사고의 납작함이다.
이 글은 투기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무제한적 자산 소유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묻고 싶다. 당신의 삶을 설계할 권리는 누구의 것인가? 당신이 지금 살지 않는 동네에 꿈을 담아두는 것조차 금지된다면, 그건 시장 통제가 아니라 삶의 통제다. 주거 윤리는 국가의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개인 각자의 것이다. 그리고 그 윤리를 한 줄 프레임으로 환원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2025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