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은 땀으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투기, 투자, 그리고 우리 사회의 도덕적 게으름

by 민진성 mola mola

“그건 노력이 아니잖아요.”

누군가 몇 달 만에 수억 원을 벌었다고 한다. 그 과정은 클릭 몇 번, 서류 몇 장, 자본의 이동. 사람들은 말한다. “운 좋았네.”, “노력도 안 하고 저만큼 벌다니.”, “그건 정당하지 않아.” 이 말은 익숙하다. 너무도 익숙하다. 특히 투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사회는 곧장 도덕적 재판을 시작한다. “사는 집도 아니면서 왜 샀어?”, “왜 네가 남보다 먼저 가격 오를 집을 선점해?”, “남들 일할 때, 넌 돈 굴려서 뭘 했는데?” 그런데 진짜 묻고 싶다. ‘노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반드시 땀과 시간의 총합이어야만 하는가?



노력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눈에 보이는 것’만 뜻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노력’을 눈에 보이는 고생으로 환원했을까? 오래 앉아 있었다든가, 땀을 흘렸다든가, 사람을 상대했다든가. 그런 식의 ‘고통의 가시화’가 없으면, 그 노력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노력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작동한다. 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기르기 위해 시장을 이해하려 책과 리포트를 파고드는 시간, 남들이 두려워할 때 베팅을 감행하는 결단력, 실패할 것이라는 조롱을 감내하며 기다리는 인내심. 이 모든 행위들은 ‘노동’과는 다르지만, 명백한 ‘노력’의 형태다.



왜 사회는 '위험 감수의 노력'은 인정하지 않는가?

한국 사회는 ‘고생의 축적’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성실함, 인내, 꾸준함은 미화되고, 속도, 판단, 기민함은 의심받는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자리 잡는다.

1. 10년 일한 사람 : 노력한 사람, 존경받아야 함

2. 6개월 투자로 이익 본 사람 : 운 좋은 사람, 의심스러운 이익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비교는 ‘노동 윤리’만이 유일한 도덕이라는 환원주의적 사고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사고는 사회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노력의 정의를 좁히는 사회는, 결국 혁신의 문도 닫는다

누군가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방향으로 시장을 분석하고, 리스크를 감수해 수익을 냈다면 그건 단지 ‘운’일까? 그걸 ‘노력 없이 얻은 부정한 돈’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 판단력? 민감성? 리스크 테이킹의 용기? 그리고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의 결단? 이 모든 것이 노력의 새로운 정의가 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생존이 아니라, 분노의 재분배만 남게 된다.



“그렇게 돈 벌면 안 되지”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렇게 쉽게 벌면 안 되지.”, “나는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왜 넌 단기간에 이익을 봐?” 이 말은 경제 논리가 아니다. 감정의 불균형, 정확히는 “내 고통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에서 나온다. 그 감정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윤리’로 포장해, 남의 방식과 속도를 도덕적으로 단죄한다면, 그건 게으른 정의감일 뿐이다.



노력은 감내의 구조다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그 사람은 무엇을 감수했는가?” 시간이든, 자본이든, 신용이든, 비난이든. 어떤 대가를 감수하고 그 이익을 얻었는가. 그게 없다면, 부정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있다면, 그건 노동은 아니어도, 명백한 노력의 결과다. 노력은 땀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감내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사회는 언젠가 노력의 기준을 스스로 배신하게 될 것이다.




#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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