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문맹과 도덕주의가 만든 위화감의 사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신용, 이자, 대출로 작동한다. 누군가는 자산을 먼저 갖고 있고, 누군가는 신용을 담보로 자산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리스크 감수의 정도와 전략적 의사결정 능력의 차이가 있다. 이 격차는 슬프게도, 아니,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을 가질 수는 없고, 심지어 같은 능력과 결단력을 가질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격차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격차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해석하느냐’이다.
한국 사회는 격차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격차를 만들어낸 사람을 도덕적 악인으로 낙인찍는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면 "투기꾼"이 된다. 대출을 잘 활용하면 "영끌족" 혹은 "탐욕스러운 자"가 된다. 투자로 자산을 늘리면 "불로소득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허용한 합법적 수단이며, 대부분은 자신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공부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인 결과다.
한국은 금융교육이 매우 부족한 사회다. 신용의 의미, 이자의 구조, 대출의 원리조차 제대로 설명해주는 교육 시스템이 없다. 그러니 ‘빚은 죄악’이라는 근대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죄악’을 감수하며 성공한 사람을 오히려 질타하는 기이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격차가 아니다. 문제는 그 격차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으로 대응하는 태도다.
격차는 없앨 수 없다. 하지만 기회를 보장받을 수는 있다. 누구나 신용을 쌓을 수 있는 구조, 기본적인 금융지식을 보편 교육하는 시스템, 상환 가능한 대출을 설계하고, 기망행위만 걸러내는 정교한 제도.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진짜 복지이며, 정의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만 보장된다면, 격차는 오히려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지금 구조의 문제를 도덕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집을 사놓고 다른 데서 전세를 살면 “투기”, 부동산에 투자하면 “국민을 고통받게 하는 장본인”, 자산 격차가 벌어지면 “불공정의 상징” 이런 프레임은 누군가의 삶을 단순화하고, 왜곡하고, 멍에를 씌운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위화감을 조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간단하다. 격차는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그걸 어떻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보다, 그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지를 사회가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같은 결과를 갖는 사회? 아니면 모두가 각자의 신용과 역량으로 기회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 후자다.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강박은 결국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공정을 설계하게 된다. 그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기회가 있고, 선택이 가능하고, 격차가 있더라도 존엄할 수 있는 사회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금융을 감정이 아니라 이해와 제도로 읽는 태도가 필요하다.
#202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