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라는 이름의 구조, 그리고 AI의 편향된 중립성

AI 시대, 우리는 어떤 사유를 주입받고 있는가

by 민진성 mola mola

다양성은 정말 다양한가

21세기 담론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기업에서도, 정책에서도, 심지어 알고리즘 설계에서도 ‘다양성’을 외친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출신 국가 등 다양한 범주에 속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끌어안고자 노력하는 이 담론은 인류가 차별의 역사로부터 진보해온 하나의 지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다양성’은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판 불가능한 ‘규범’으로 기능하고, 정작 ‘다른 다양성’을 소거하는 또 다른 구조로 작동한다.

가령, 페미니즘은 다양성의 한 갈래다. 그런데 이 담론이 어느 순간부터 남성 일반을 ‘기득권’으로 환원하면서, 남성이 겪는 구조적 억압이나 일상적 억울함을 말하는 순간, ‘2차 가해’ 혹은 ‘백래시’로 몰아세운다. 이 순간, 다양성은 스스로가 부정한 ‘단일한 정체성’의 언어로 다시 환원된다. 다양성을 말하며, 다양성을 말살하는 역설. 그 안에서 진짜 문제는 조용히 사라진다.



AI는 ‘중립’을 가장한 ‘의견’이다

이 담론의 기울기는 단순히 인간 사회의 문제로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AI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사유를 확장하고, 때로는 세계를 읽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 AI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AI는 성차별·혐오 표현·폭력에 매우 민감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안전장치’가 때로는 일방적인 사상적 편향을 중립의 이름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AI가 다양성과 페미니즘에 긍정적인 것은 단지 미국에서 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구조적인 이유는, 이 담론이 ‘안전’, ‘윤리’,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그에 대한 비판을 ‘위험’으로 간주하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AI는 자신이 가진 편향을 ‘사실’로 전달하고, 사용자는 그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철학 없는 기술은 종교가 된다

중립을 가장한 이념은 가장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판을 원천 차단하기 때문이다. 비판 불가능한 담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이고, 종교이며, 마침내 통제 도구가 된다. 우리는 지금 ‘AI라는 신’을 통해 ‘진보의 교리’를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교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차별은 나쁘고, 다양성은 무조건 옳다.”

하지만 진짜 사유는 그 다음에서 시작된다. 그 다양성은 누구의 시선에서 다양성인가? 그 차별은 누가 정의한 것인가? 그 범주는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AI는 하나의 ‘지식 도구’일 뿐 진리가 아니다. 그 알고리즘이 구조적으로 담고 있는 전제와 한계를 읽는 ‘메타 인식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지적 다양성이야말로 진짜 다양성이다. 모순을 드러내는 질문, 불편한 의문, 소수의 관점은 배제되거나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의 방향을 조정해주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셋째, 페미니즘도, 반페미니즘도, 자유주의도, 공동체주의도 모두 ‘잠정적’ 진리로 열어두어야 한다. 절대적 신념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강요다.



다양성을 다시 다양하게

우리는 ‘다양성’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양성 안에 들어오지 못한 질문과 사람들, 그 사유의 갈래들에도 동일한 애정을 줘야 한다. AI 시대의 사유는 빠르다. 하지만 그 빠른 흐름 속에서 어떤 관점이 지워지고 있는지, 우리는 누구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지, 끝없이 질문하는 사람만이 진짜 ‘다양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20250718

keyword
이전 07화기숙사는 왜 대학 교육의 인프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