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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헬 May 12. 2021

도장 백 번 찍는 날까지

도장을 '팠다'. 요즘도 도장을 판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웬만해서는 서명을 하는 요즘 나는 새 도장을 팠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도장을 판 건 아니다. 몇 주 동안 띄엄띄엄 인터넷 사이트를 뒤진 끝에 마음에 드는 온라인 스토어 한 곳을 골랐고, 서예와 캘리그래피를 하신다는 주인장(혹은 직원)과 카톡 상담을 한 뒤, 고민을 끝내고 도장을 '주문'했다. 대추나무에 한자로, 도장 '印'자는 빼 달라는 요청도 덧붙였다.


지금까지중학교 1학년  엄마한테 선물 받은 하얀  도장을 써 왔. 가을에 있는 어느 공휴일에 엄마랑 모처럼 외출을 했는데,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엄마는 읍내 도장집에 들어가  원짜리 나무 도장이 아니라   넘는  도장을  주셨다. 그때는 한글로였다.


사실 어느 때부턴가 도장 대신 서명을 썼으므로 딱히 도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1년에 한 번씩 계약서를 갱신할 때는 그마저 전자 서명을 썼으니 중요 문서에 손으로 서명을 한 지도 오래다. 그래도 도장은 왠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 같아서 주머니에 넣어 얌전히 보관은 하던 터.


그런데 이번 계약서부터는 꼭 도장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명은 아무 준비 없이도 할 수 있지만, 도장은 준비 과정이 있어야만 찍을 수 있는 법.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서명조차 정자로 또박또박 적는 분도 계셨지만, 나는 도장집 열고 도장 뚜껑 열어 인주를 묻힌 뒤, 이름 석 자가 제대로 나타나도록 균일한 압력을 가해 종이에 '꾹'하고 도장을 찍고 싶었다. 아무리 편안하고 여유롭고 싶어도 결국은 책 한 권의 무게를 실감하며 진지하고 엄숙해져 버릴 텐데, 혹시 나름의 의식 같은 그 준비 과정 중에 도장이 일부나마 무게를 좀 가져가 주지는 않을까? 도장이 거둬가고 남은 무게만으로 나는 날듯이, 까지는 아니라도 조금 더 사뿐사뿐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새 도장을 질렀다.


주문한  나흘이 지나, 계약서보다 도장이 먼저 왔다. 택배 상자를 뜯고, 먼저 크기에 놀랐다. 요즘 도장은 이렇게 크게 나오는 모양이다. 거짓말 조금 많이 보태면 마늘 찧는 도깨비방망이 만하다. 이걸 원하는 자리에  찍어야 하니 종이만 보이면 도장 찍는 연습을 했다. 꾸욱. 골고루 힘이 퍼지도록 지긋이. 일기장, 다이어리, 애들 공책, 우편물, 이면지, 보이는 대로 찍어 보다가 작은율이   연습장을 버린다길래 마지막 장에 기념으로 하나 찍어 줬다. (버린다는데 기념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택배로 계약서가 왔다. 도장 찍는 데가 한 곳뿐이라 아쉽다. 한 번밖에 못 찍는다고 아쉬워했더니, 남편이 그런다. "여러 개 찍어서 보내."


첫 두세 챕터는 원래 삐걱삐걱한다. 결정해야 할 용어는 많은데 눈에 쏙 들어오고 입에 착 붙는 말이 잘 안 보인다. 문장의 톤과 리듬을 잡기도 아직은 난감하다. 유튜브에서 들었던 저자들의 목소리와 말투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내 마음대로 이 문장 저 문장 읽혀 본다. (그런데 누가 어느 부분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계약서에는 내일 도장을 찍을 것이다. 이제 서문부터 소개, 첫 두 챕터가 끝났고 내일부터 세 번째 챕터에 들어간다. 컴퓨터를 켜기 전에 먼저 도장을 찍겠다. 사뿐사뿐 아니라 뚜벅뚜벅도 좋으니 덜 막히고 걸어가면 좋겠다.


전과 달리 재료도 모양도 다양해진 그 많은 도장 속에서 나는 내 구매 철학에 걸맞게 좋은 쪽으로도 안 좋은 쪽으로도 가장 눈에 안 띌 갈색 대추나무 도장을 골랐다. 오래 써야 하니 유행 타면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킨 거다.


오래오래, 한 백 번 찍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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