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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상 Oct 08. 2020

사슴고기 스튜의 진실 (1)

아일랜드 농장일꾼

Adare의 오래된 교회, 테레사와 이별하고 우두커니 서 있던 자리


일요일 오전 11시


두번째 농장(?)주인 테레사와 이별의 포옹을 나눈 뒤, Adare 관광안내소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작은 캐리어 한 개로 시작한 짐이 자꾸 새끼를 치는지 늘어났고 짙은 안개가 무거워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다행히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안내소 직원은 친절했고 잡다한 짐을 맡아주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안데르센의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마을 Adare를 뚜벅뚜벅 거닐었다. 마을 한 바퀴를 금새 돌고 나자 딱히 할 게 없어서 샐러드와 맥주를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았다. 이 작은 마을에는 세월의 흔적이 구불구불 남은 교회와 옛 가옥이 있었고 뭔 놈의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타국에서 정해진 거주지 없이 돌아다닐때의 불안감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하늘 아래에 홀로 앉아 지난 7주동안 아일랜드에서 농장일꾼으로 지낸 기억을 더듬었다.


첫번째 우핑은 유기농 농장이 아닌 재클린의 비앤비 호스텔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한국에서 온 외국인이 안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졌다. 두번째 우핑은 호스트인 테레사의 집에 일이 생겨서 예상치 못하게 떠나야 했다. 타국에서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나앉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첫번째 우핑하우스에서 인연을 맺은 스테파니가 본인이 머물고 있는 농장을 소개해줬다. 고민할 시간이 없기에 바로 그 농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갈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서일까. 지난 7주간 두 곳의 우핑하우스에서 별별 일을 겪었지만 마지막 농장에서는 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상상도 못했다.





스테파티와 리아가 죽은 사슴을 옮겼다는 그 헛간


일요일 오후 4시


나는 곧 버스를 타고 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남서쪽 County Kerry의 Kenmare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 창 밖의 풍경은 평화로운 초록 들판에서 높고 험준한 절벽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스르륵 판타지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과연 Wild Atlantic way 라 불릴 만 하다. 버스에서 내려 두리번거렸더니 키가 크고 눈이 동그란 아저씨가 나타나 자신을 마이크라고 소개했다. 엄청 마이크처럼 생기지 않았다. 제임스나 루이 일 것 같이 생겼다.


세번째 농장의 호스트인 마이크는 갑작스럽게 인원이 필요해서 나의 방문을 반겼다. 심하게 덜그덕 거리는 트럭을 타고 마이크의 집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상상속의 우핑 하우스가 보였다. 마을 중심에서 차로 십분 쯤 언덕을 타고 올라가면 두 개의 커다란 비닐하우스와 여러채의 헛간이 있었고 집은 전형적인 아이랜드식 2층 집이었다. 이게 바로 우핑이지! 이전의 우핑은 다소 아쉬웠는데 드디어 제대로 된 유기농 농장을 찾아온 것이다. 위기를 맞이했을 때 친구로부터 기대하지 않은 도움을 받았는데,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 몰랐다.


마이크는 내가 머무를 방을 소개해줬고 나보다 먼저 와서 일꾼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던 스테파니와 리아가 이우리가 할 일들을 알려줬다. 물론 마이크가 없는 틈을 타서 그의 뒷담화도 놓치지 않고 들려주었다. 역시 일꾼들의 낙은 만국공통인가보다. 덕분에 영어가 많이 늘었다. 그들은 마이크가 참 좋은 사람인데 식사에 까다롭다고 불평했다. 아일랜드 아저씨가 까다로우면 얼마나 까다로울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는 그가 사슴을 옮겨 달라고 했단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먹을 것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왜 사슴이 나와? 내 영어 실력을 의심하고 있을 때 리아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도 그 Deer가 그 deer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장갑을 끼고 숲속에 들어갔더니 피가 잔뜩 묻은 사슴 사체가 있었단다. 시골 마을의 숲속은 저녁 무렵에 이미 어두웠고 당장이라도 숲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고 한다. 그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직접 죽은 사슴을 수레에 얹어 헛간까지 옮겼고 부엌으로 돌아오니 겉옷은 피범벅이었다고 말했다. 사슴이 생각보다 무거웠고 아주 미끄러워서 옮기기 어려웠다는 말에도 나는 진지하게 듣지 않고 깔깔 웃어 넘겼다. 사슴이라니 깔깔



많은 일이 있었던 마이크의 부엌

일요일 저녁 9시


유럽에 온 뒤로 계속 저녁을 여덟시 이후에 먹었다. 대부분 직접 요리를 하는데다가 요리에 걸리는 시간을 당연하게 생각해서 서둘러 준비하지 않는다. 티 한잔 하면서 느긋하게 스프를 끓이고 감자를 삶고 샐러드를 손질했다. 런던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는 리아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언니였다. 이후 그녀에게 영국식 오븐 요리 몇 가지를 배웠는데 도무지 혼자서는 그 맛을 낼 수가 없어서 아쉽다. 아무튼 그녀는 냉장고에 있던 스튜를 꺼내왔고 어제 만든 사슴고기 스튜라 오늘까지 다 먹는게 좋다고 했다. 음? 진짜 사슴고기로 스튜를 끓인건가? 그 사슴고기 합법적인거냐고 물었더니 갑자가 어디서 마이크가 나타나 당연히 합법이라고 대답했다. 장화를 신고 나타난 그의 한 손에는 사냥용 총이, 다른 손에는 커다란 랜턴이 들려있었다.


I'm going to get some food

마이크가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순간 스테파니와 리아의 눈에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난 그것도 모르고 마이크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사슴고기 스튜를 꺼내서 데피고 있을 때 사냥총을 들고 농담을 하는 마이크의 유머가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이웃집 아저씨가 트럭을 타고 나타나더니 마이크와 함께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서야 나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 중 농담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맙소사. 진짜 사냥해서 잡은 사슴으로 이 스튜를 끓인거라고? 이 정도로 날 것의 우핑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우리 셋은 저마다 생각이 많은 눈을 하고선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따뜻한 스튜를 한 숟갈 뜰 즈음 탕- 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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