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해하는 단서

그림보기 I

by Rumina

그림들 사이를 걸을 때 행복하다.

명화를 실물로 볼 때 감격스럽다.

한 화가의 그림으로 구성된 전시를 관람할 때는 그의 인생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고흐 전에서는 습작 스케치들이 쓸쓸하게 느껴져 괜히 눈물이 났고

모네 전에서는 빛이 가득한 배 그림에 압도되어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에드바르 뭉크의 [마돈나]이다.

중앙에 눈을 감은 여인이 크게 자리하고 있고 남성의 생식 세포가 프레임을 장식하고 있다.

왼쪽 하단에는 태아처럼 생긴 인물이 위축된 표정으로 쭈그려져 있는데,

해설에 의하면 뭉크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마주했을 때 제목을 [가족]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되며 웃음이 났다.

제목이 달랐다면 작품의 해석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마돈나]라는 제목이 난해하고 복잡한 마음을 남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강렬한 작품을 만났다.

동굴 안 저 멀리 곰이 걸어오고 있다.

어머니는 한 손에 도끼를 들고 두 아이를 피신시키고 있다.

드러난 젖가슴이 아니라면 아버지로 보일 만큼의 근육질 몸과 곰을 바라보는 결연한 표정이 압도적이다.

저기에 오고 있는 큰 위험에도 아이들은 어머니 곁에서 안전해 보인다.

큰 사이즈와 더불어 그림 전체가 주는 분위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른 작품을 보러 갔다 가도 눈에 어른거려 몇 번을 다시 돌아와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제목은 불어로 쓰여 있었고 뜻이 궁금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제목이 ‘Deux meres (Two Mothers)’임을 알게 되었다.

그림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저기에 오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엄마’라는 사실로 그림은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구조물을 가지고 있다.

인지 행동 치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국의 임상 심리학자 아론 벡이 발견한 사실이다.

이를 인지왜곡이라고 한다.

그가 말한 여러 개의 인지 왜곡 유형 중 하나는 ‘낙인찍기’이다.

’잘못된 명명’, ‘꼬리표 붙이기’라고도 한다.

이 유형은 사건이나 사람, 자기 자신을 말할 때 과장되거나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무능하다’와 같은 부정적인 꼬리표를 자신에게 붙인다.

또는 ‘너는 쓰레기야’, ’너는 구제불능이야’ 등의 낙인을 타인에게 부여한다.

사건이나 상황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단정을 하고 나면 정말 그렇게만 보인다.


우리의 뇌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다.

제목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과 상황은 붙이는 [꼬리표]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뿐이다.

세상에 붙인 꼬리표는 자신에게 붙인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외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남을 판단하는지 보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타인의 어떤 성향 때문에 ‘쓰레기’라는 낙인을 찍었다면,

자기에게도 같은 성향이 있으며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구제불능’이라고 비난한다면 그는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무수히 찍어대던 부정적인 낙인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세상과 사람은 아름다워질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더 부자연스럽고 힘겨울지도 모른다.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억지로 바꾸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일 수 있다.

제일 좋은 건 낙인을 찍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만 분류하고 단정 짓는다.

늘 분류되고 단정 되었기에 그 상태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제목은 작가의 의도와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세상에 부여하는 꼬리표는 자신을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왜 그런 제목들을 세상에 붙이고 있는지 한 번쯤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낙인찍지 않기’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연습으로 어느 그림 하나 제목 없이 느껴 보기도 하고,

제목으로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익숙함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전 11화부모는 부모의 자리에, 자녀는 자녀의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