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배움'을 위한 무대일 뿐

공연보기 I / 엘렉트라

by Rumina

공연장에 들어가면 다른 시간과 공간이 펼쳐진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생동감이 느껴진다.

해가 쨍쨍한 토요일 한낮에 어두운 드라큘라의 성을 방문하기도, 자동차가 달리는 거리를 지나 설화의 세계를 다녀오기도 한다.


충격적인 결말로 기억에 남은 작품이 있다.

결말이 황당해 함께 본 친구와 욕을 하며 공연장을 나왔다.

그런데 그 어이없는 결말이 갈수록 진리이다 생각되고 연출자가 천재 같다.

장영남, 서이숙 배우가 출연한 연극 [엘렉트라]이다.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대한 심오한 내용을 기대하며 선택하였다.


엘렉트라는 남동생을 이용하여 엄마에게 복수하는 딸이다.

어머니가 내연남과 함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다.

극은 그리스 신화의 한 부분이 현대로 각색되어 펼쳐졌다.

배경은 지하 벙커가 되었고 엘렉트라는 정부군에 저항하는 게릴라들의 리더로 설정되었다.

현대 의상을 입었으나 배우들의 대사 톤과 분위기는 고대 같았다.

인물들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갑자기 총알이 쏟아지며 모두가 죽는다.
주인공인 엘렉트라도 죽는다.

극을 채우던 모든 인물이 쓰러지고 무장한 복면의 사람들이 무대 위를 말없이 돌아다니며 막을 내린다.


인물들이 웅장하게 지르던 대사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찬물을 끼얹듯이 만난 고요가 허탈했다.

복수와 개인이 주장하는 정의, 각자의 입장 등으로 논쟁을 하고 갈등을 빚던 모든 이야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들과 함께 한껏 심각했던 내 마음도 벼락을 맞은 듯 고요해졌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즐거운 일도 속상한 일도 생긴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건이 깊이 감춰둔 열등감이나 상처를 건들면 하루 종일, 혹은 며칠을 후폭풍에 시달리곤 한다. 수도 없이 곱씹으며 그 상황 속에 서 있는다.

똑 부러지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그런 일을 당하게 한 인생 자체를 탓하기도 한다.

드러난 상처를 다시 덮는 아픈 시간이다.

상처의 깊이에 따라 후폭풍의 시간도 달라진다.


어쩌면 인생은 꼭꼭 감춰둔 감정이 들춰지고 덮어지는 일의 연속인 것 같다.

감당할 수 없어 깊이 묻어둔 비밀은 원래 모양을 잃어버리고 커다란 괴물이 된다.

방치된 감정은 일상의 사건 속에서 갑작스럽게 올라오곤 한다.

때로 어떤 사건은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무지해서 무례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의 행동과 말이 ‘자기 증명’이라 할지라도 불쾌한 건 사실이다.

불쾌함을 표현하고 사과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순간에 마무리 짓지 못하고 과거와 연결된 추측과 단정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구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면 사실로 여겨진다.

이렇게 사실은 왜곡되고 갈등은 반복된다.


사건은 연극 무대와 같다.
딱 그 순간, 볼 것을 보고 배울 것을 배우라는 자신만을 위한 무대.


무대에 등장한 인물들과 상황, 대사는 주인공을 위한 장치이다.

목적을 이루면 사라지는 연기이다.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겠지만 사건은 연속성을 갖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상황은 중립적이다.

연속된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나의 태도와 반응이 달라지면 상대의 반응 또한 달라진다.

같은 사람을 매일 만나더라도 새롭게 대할 수 있다.

극복해야 할 것은 사람과 상황이 아니다.

오래 가져온 반응과 태도의 고착된 패턴이다.


어느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도 ‘배움’을 위한 무대라고 생각해 보자.

장면의 목적을 살피고 배우면 다시는 펼쳐지지 않는다.

같은 상황이 펼쳐질 때 다른 반응을 하게 될 테니까.

사람은 타인에게 그리 관심이 없다.

뭔 이상한 짓을 해도 그 순간 각자의 맥락에 따라 반응하고 말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활과 고민으로 바쁘다.

새로운 반응이 어색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오래된 무대를 비워야 한다.

옛이야기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등장인물들을 무대 밖으로 내보내고

나도 그만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무대가 비어야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기회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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