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먹으며 자랐다면

그림보기 II

by Rumina

창작물은 창작자를 반영한다.

작가의 그림은 작가를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서 부스에 앉아있는 작가와 그림이 닮아 있는 모습을 보며 신기했다.

화가의 그림을 시기 별로 감상할 때는 화풍이 변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력이 자라고 생각과 철학이 성숙함에 따라 그림도 깊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여러 전시와 그림들을 보며 어느 화가는 호감에서 비호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명성만큼의 감흥이 없기도 했다.


드로잉 자료로 처음 만난 [에곤 쉴레]는 쓰라려 보이는 자화상에 내 살이 다 아픈 것 같았다.

어떤 작품들은 성적 묘사가 두드러져 불편했는데 아이를 이상하게 그려 놔서 더 싫었다.

껍데기 까놓은 듯한 그림 속의 인물들을 보며 ‘얘도 많이 아팠구나’ 했다.

자료를 뒤적거리다 아이를 이상하게 그려 놓은 그림을 보고 괜히 화가 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그의 [가족]이라는 그림을 알게 되었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화상과는 달리 근육과 피부가 제대로 있고 표정도 편안해 보인다.

길고 튼튼한 팔과 커다란 손에서는 가족에 대한 의지가 느껴진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릴 필요가 없다’ 더니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아이는 임신 6개월 만에 스페인 독감으로 엄마와 함께 죽었다.

에곤 쉴레도 3일 뒤에 죽었다.

슬픈 이야기가 더해져 그림이 더 깊이 닿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세상에 오지 못했지만 아빠의 손 끝에서 태어나 영원히 살고 있다.

그는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했지만 훌륭한 아버지이다.


많은 아이들이 ‘너는 없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먹으며 자란다.


사람의 소통 수단은 언어만이 아니다.

눈빛과 말투, 표정과 행동 등의 비언어가 더 깊게 다가오는 법이다.

무의식은 비언어적으로 더 많이 표현된다.

‘탄생은 축복’이라는 말과 현실은 다르다.

환영받으며 세상에 오는 아이들이 당연히 많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원치 않게 생겨서, 부모가 원하지 않는 성별로 태어나서 환영받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혹은 오해할 수도 있다.

‘되는 것’ 보다 ‘안 되는 것’이 많은 환경이라면 아이는,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나는 없어야 한다.’

오래 가져온 가장 크고 깊은 오해이다.

나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임신 거부증인 여성의 태아는 위로 길게 자라서 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입덧과 태동 같은 것도 없다. 그렇게 태아는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데 성공한다.

나를 낳다가 죽을 뻔했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어른들의 생각 없는 말들은 마음에 쌓였고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았던 환경은 심증에 확신을 주었다.

이렇게 없어야 되는 존재를 이고 지고 살았는데 잘 살았다. 마음만 괴로웠다.

깊은 무의식으로 ‘나는 없어야 된다’면서 방황했는데 한 번도 나를 완전히 놓아본 적은 없다.


어느 순간 그것이 이상했다.

나는 없어야 한다는 왜곡된 생각, 그러나 그와는 상관없이 삶은 또 다른 의지로 흘러왔다.

다만 그 생각에 집착했던 마음이 고통을 만들었고 가끔씩 생의 끝에 서게 했다.

살아서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울고 불고 하는 실재에도 불구하고 ‘없어야 한다’는 오래되고 근거 없는 생각을 붙들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라고 믿었다.

현재와 미래는 늘 불안했다. 그 생각 안에서는 현재도 미래도 ‘없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사람에게 ‘없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지나가는 길고양이, 들풀에게도 그럴 수 없다.

자신 스스로에게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는 엄청난 오만이며 깊은 무지이다.

자기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허구이다. 거짓말이다.

분별력이 없는 시기에 그런 메시지를 먹어야 했다면, 그것 외의 다른 것은 알 수 없어 사실로 믿었다면 지성과 상식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에곤 쉴레의 아이는 아빠의 손끝에서 태어나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

’없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성립하려면 일단 그림을 실제로 만나야 하고 불을 붙어야 한다.

그림 앞에 설 수야 있겠지만 불을 붙이는 건 불가능하다.

성공했다 할지라도 천문학적인 배상을 하거나 감옥에 가야 한다.

쏟아지는 비난도 받아야 한다.

혹 그림이 없어졌더라도 이 작품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있음’을 ‘없음’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직 거짓을 믿겠다는 ‘의지’ 외엔.




이전 12화나를 이해하는 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