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 II
연필 소묘가 좋다.
소묘는 색을 쓰지 않고 선으로만 그리는 회화표현이다.
슥슥 그을 때의 느낌과 소리가 좋고, 연필만의 소박한 감성도 좋다.
어느 날, 사랑하는 조카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 놓고는 ‘흑연이 보석 같다’고 생각했다.
뭉쳐 있는 연필심이 생각과 원함을 따라 종이 위해 뿌려지면 반짝거린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을 그릴 때 그렇다.
연필의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기본 원소가 같은 ‘탄소’라는 사실이 나에겐 특별하다.
잘 그려진 연필화에는 다양한 선이 필요하다.
짧은 선과 적당한 선, 긴 선 등이 진함과 연함을 오가며 종이에 새겨져야 한다.
선이 다양할수록 디테일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연필 하나로 그리는 그림에도 많은 종류의 선과 명암이 필요하듯 인생도 그러하다.
각양의 경험이 삶을 깊고 아름답게 한다.
어떤 나쁜 경험이라도 미워할 이유가 없다.
경험은 ‘나 자신’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 ‘나’를 규정 지을 수 없다.
내가 잘못해서는 더욱 아니고, 나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한때, 나는 용서하지 않아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흘려보낼 만한 일들도 켜켜이 쌓아 끌어안고 있었다.
작은 일 하나도 일일이 쓰린 마음으로 벽돌처럼 쌓았다.
그럴 일이 아닌데도 과거의 경험과 같은 모양으로 여기며 두텁게 쌓아 두었다.
마치 방공호 같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주변을 벽으로 쌓아 올리고 숨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들이 너무 아프고 이해되지 않을 때,
언제 또 일어날지 몰라 두려울 때,
성을 쌓아 올리고 숨는 것 외에는 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순간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쌓은 돌들이 대신 말하고 반응한다.
모든 사람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의 높이와 넓이, 깊이의 차이는 각자의 환경만큼 천차만별이다.
크고 작은 돌들 덕분에 시냇물에서는 맑은 소리가 난다.
가져온 경험들은 자기 자리에 있는 돌과 같다.
흉측한 색으로 모난 돌이나 예쁜 색으로 빛나는 돌이나 거기에 있을 뿐이다.
경험은 경험일 뿐, 자기 자신이 아니다.
다만 경험한 일로 인한 감정과 생각이 의식의 한 부분에 들러붙어있다.
그 감정과 생각이 마치 자신인 냥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를 흐르는 통합적인 내면의 소리가 아닌 흩어져 있는 과거의 경험과 감정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냇물이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이 아니다.
누군가는 ‘생존자’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끔찍한 시간을 보낸다.
그 앞에서 경험이 자신이 아니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다.
온몸과 마음, 의식과 무의식에 새겨진 고통과 눈물은 타인이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어떤 말과 몸짓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로 영원히 살지 않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
어떤 상처든 과정을 겪으면 치유된다. 어떤 일도 자신의 본성에 상처 낼 수 없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표현된다.
이 사실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어둠이 없이 빛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자연의 이치이다.
깊고 깊은 어둠을 경험하였다면
그만큼 가진 빛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경에서 신은 ‘빛이 있으라!’ 하며 세상을 창조하셨다.
나는 하얀 종이 위에 어둠을 만들며 그림을 짓는다.
내가 가져온 어둠은 나를 빛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그림자만 바라보면 어둠뿐이지만, 그림자가 드러내는 빛의 모양에 집중하면 빛나는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을 거두고 게워서 빛을 보는 연습을 해보자.
지나온 시간 곳곳에 맺혀 있는 경험을 보지 않고 그들을 통과해 온 자신의 빛나는 본질을 보는 연습을 해보자.
본질 안에서 누구나 빛나고 아름답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