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실제는 다르다.

그림 그리기 III

by Rumina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할 때,

특히 인물화는 보이는 대로 그리다 보면 실제 모습과 다른 그림이 된다.

많은 경험으로 훈련된 화가가 아닌 보통 사람의 눈은 정확한 형태를 한 번에 읽지 못한다.

보조선이 필요하다.

전체의 비율, 간격, 기울기 등을 흐린 선으로 그려 두어야 형태가 틀어지지 않는다.

보조선에 담긴 정보가 많을수록 그리기가 수월하다.

그리다가 때로는 멀리서 봐야 한다. 거꾸로 놓고 보기도 한다.

한순간에 감각하는 정보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다양한 시점과 시선이 주는 정보가 알맞게 해석되어 손끝에 전달되어야 실제 모습을 닮은 그림이 된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온몸이 묶인 사람들이 지하 동굴에 있다.

뒤에는 횃불이 있고, 횃불과 죄인들 사이에는 가로로 난 길이 있다.

이들은 길을 따라 세워진 담장과 밝은 불빛을 등에 진 채 앞에 있는 동굴 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목마저 고정되어 옆도 볼 수 없다.

사람들이 온갖 물건들을 치켜들고 길을 지나갈 때마다

불빛에 의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도 벽에 부딪혀 마치 그림자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진짜 사물을 본 적 없는 죄수들은 벽에 보이는 그림자를 실제라고 생각한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대표적 대화집인 [국가 Politeia]에 나오는 동굴우화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죄수들과 얼마나 다를까?


어린아이는 사실을 인지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부모를 통해 세상을 보고 양육 환경을 전부로 느끼며 자란다.

부모가 비춰주고 보여주는 풍경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된다.

부모는 동굴 벽이고 세상은 사람들이 들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물쯤 될 것 같다.

자란 환경이 따뜻하고 안전하였다면 아이는 따뜻함을 당연히 여기며 평생을 살아간다.

반대로 차갑고 불안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을 위험하다고 믿는다.

자라면서 환경이 달라져도 익숙함은 무의식 깊이 남아 있다.

가장 흔한 예가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 말하면서도 부모를 닮아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싫어하는 딸이 그와 닮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이다.

사람은 익숙한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이는 대로 믿고 듣는 대로 믿는다.
자주 듣고 자주 보아서 익숙한 것을 진실로 여긴다.


따지고 보면 근거가 없는데도 사실이라 믿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감정적으로 결정하고 이성으로 합리화한다.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이성적이라는 착각 속에 감정적인 판단과 주장을 한다.

이것이 세상이 소란스러운 이유일 것이다.

인류의 구분이 나라와 언어만은 아니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 각자의 문화와 언어가 다르다.

미세하게 본다면 너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사람에게 ‘객관적’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은 순도 100%의 사실은 없다.

그러나 왜곡된 시선과 한쪽으로 쏠린 관점으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대상과 닮은 그림을 그릴 때에는 다양한 정보를 가진 가이드 선을 그어 놓고

멀게도 보고 때로는 뒤집어서 보기도 한다. 그래야 전체 형태를 인지할 수 있다.

이처럼 사실을 바라볼 때에도 다양한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직장 상사가 차갑게 굴었다면, ‘내가 뭘 잘못해서 그래’라고 즉시 단정하기 전에 다른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심코 했던 행동일 수 있다.

설사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 삼고 벽을 치는 상대방의 미숙함이 더 본질적인 원인이다. 그는 그렇게 행동할 자유가 있다. 나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자유가 있다.


동굴 속 죄수들이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묶인 사슬을 끊어야 한다.

그래야 고개를 돌려 사물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묶여 있는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기억과 감정을 상식에 맞게 재인식하는 것이다.

강요받았던 관점과 스스로 갇힌 동굴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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