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장애가 매우 심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본인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열심히 떠들고 다녔다. 그 행위는 면접시험 보러 가서 헛소리하는 것과 같았고, 그 결과, 당연히 취직이 안 됐다.
하지만 공자의 말은 이론적으로 맞다는(또는 맞다고 믿고 싶은) 데 문제가 있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道를 논할 수 없다.①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은 질(質 , Quality)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잡한 옷과 거친 밥(粗衣粗食)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②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기서 말하는 선비(士)는, ‘착취 담당 바람잡이’와 다르지 않았다.
농업사회는 단순 재생산을 반복하는 사회로, (중략) 이 수직적 신분사회에서 사제와 학자는 농민을 착취하기 위한 당근, 즉 도덕적 기반을 제공했다. (중략)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중국과 조선에서는 농민 착취를 누가 담당했을까? 사대부(士大夫)였다.③
따라서 사대부가 제공한 도덕적 기반에 숨은 의도 즉, 현실적 의미는 공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다만 공자가 현실적 의미를 정말 몰랐거나, 아니면 끝까지 몰랐다고 한 것만 다르다.
노동의 신성함은, 최대한 많이 생산하라는 것.청빈한 삶에 만족하라는 것은, 최소한만 소비하라는 것.천국에 가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생전에 보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④
이쯤 되면 무엇이 이상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는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헛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또는 옳은 말인데, 현실의 위정자가 반칙을 계속했거나)
그러므로 선비는 선왕의 도에 뜻을 두어, 그 마음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⑤
백성의 마을을 편하게 해주는 선비(정치가)! 그것을 양성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면, 공자는 철저히 실패한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부 과거 이야기이고 현대화된 자유 민주주의 강소국 대한민국의 경우는,
다르다........
다른가?......
다를까?.......
다를걸?.........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한국의 정파는 명목상 국익 증진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의 실질적이고도 강력한 동기는 국익이 아닌 엽관(獵官)에 불과하다. 정파 간의 싸움이 민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파에게 벼슬자리를 얻어주고 상대 파는 내치기 위한 것이다(William Elliot Griffis)⑥
한국의 정치적 당파 싸움은 원칙을 둘러싼 갈등이 아니라 관직과 돈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정부 내의 지위를 얻기 위한 다툼이다. (Isabella Bird Bishop)⑦
사실 위의 인용문의 주어는 한국이 아니고 ‘조선’이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어를 ‘한국’으로 바꾸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만일 어떤 놈이, "자기 마음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고(其心在安民), 본인은 조잡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며(不恥粗衣粗食), 살아생전에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지금까지 수 천년 간 그런 놈(들)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