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끝에 큰비를 만나니 금세 가뭄 생각은 잊어버렸다. 황토색으로 넘실대는 풍만한 한강을 보면 다른 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페르소나(persona)를 이야기하자면 물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릴 적 아버님 사업이 망해 낯설게 지어진 집에 산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회상하시던 그때는 무척이나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내 기억은 다르다. 특히 비 오는 여름날 슬레이트 지붕 위에 종종거리며 울려대던 빗소리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나중서야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트는 물론 육중한 슬라브 구조 또는 기와를 얹은 집에서는 빗발이 종종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부자들은 그저 넓디넓은 창에 붙어 아메바처럼 꿈틀대는 소리 없는 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여름에는 소나기가 제격이어서 그 소리가 마치 폭포수 소리와 같다.
겨울이면 싸리 눈이 제격이어서 마치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①
좌천돼 지방에 처박힌 것도 심란한데 살림도 팍팍해 지붕을 이을 기와를 살 형편이 안된다. 그러나 산과 들에 지천으로 자라는 대나무로 지붕을 이으면 누추하긴 하지만 기와를 쓰는 것에 비해 돈과 품이 덜 든다. 그러고 보니 또 생각지 못했던 나름의 흥취가 적지 않다.
그도 내가 어릴 적 들었던 빗소리를 들었던 게다.
몇 해 전 봤던 영화 「기생충」에서도 비를 만날 수 있었다. 창문 밖으로 비가 오는데 땅에 떨어졌던 빗물이 튀어 반지하 창문을 때리는 장면, 비는 고급 장난감 텐트를 적실 수 없었지만,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살림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기택(송강호 분)은 반지하에서 지하로 내려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긴 비를 만날 수 없는 곳이다.
물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은 겸손과 겸양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 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중략)
땅처럼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더불어 사귐에 아주 인자하고,
말은 매우 믿음직하고, 발라서 잘 다스려지고,
일함에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춘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②
이 구절이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 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어느덧 사람 이야기로 바뀐다. 그리고 결론은 다시 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뭐 좋은 말 같기는 한데 너무 엑센트가 없어 밋밋한 것이 사람 사는 맛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논어』에서는 물을 지혜와 연관 짓는 공자를 만날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③
공자의 특징 중의 하나가 말이 짧다. 조근조근 자세히 설명해 주는 법이 없다. 그저 툭 던져놓고 듣는 사람이 두고두고 새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이 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난 물을 싫어하지 않는데 왜 멍청할까? 혹시 물이 아니고 술 아닐까? 나는 술만 마시면 세상의 모든 일과 특히 정치분석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을 여럿 알고 있는데..........
아침 출근길 전철 창을 통해 본 한강은 그 폭을 한껏 넓혔다. 비 때문에 엊그제 맥주 약속 깨졌는데 오늘은 따가운 햇볕이 상큼하니 반갑다. 그래도 며칠은 더 험한 비를 견뎌야 장마가 물러갈 터인데, 걱정 미리 당겨서 할 일 뭐 있나? 며칠 못 봤던 햇볕이 뽀송하게 말려 논, 길모퉁이 편의점 맥주라도 시원하게 한잔할 일이다.
① 왕원지(王元之)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가 출전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夏宜急雨 有瀑布聲, 冬宜密雪 有碎玉聲
② 노자 『도덕경』 제8장이 출전이다.
王弼 지음,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2005. ㈜도서출판 한길사. 경기, 파주. pp. 71-72. 원문은 아래와 같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③ 김학주 역주, 『논어, 論語』 2009.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서울. pp. 96-97. 원문은 아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