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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두교주 Sep 26. 2024

의병들은 다 어디 갔을까? - 無所不至의 鄙夫들

제17 양화 편 (第十七 陽貨篇) - 15

  임진왜란 때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글을 읽던 선비는 물론, 종교인(승병), 농민, 천민 심지어 기생들까지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을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후 중국군이 쳐들어온 전쟁(호란)에는 의병 이야기를 보지 못했다. 나는 이점이 항상 이상했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왕과 높으신 분들은 지들만 살겠다고 도망갔다. 이점은 중국이 쳐들어왔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폼 잡기 좋아하는 사회 지배층은 언제나 지들만 살려고 최선을 다했고, 의병의 주역이었던 우리 소인들은 멸시와 천대 그리고 통치와 착취의 대상들이었다. 그런데도 왜란과 호란, 두 전쟁에서 의병의 존재가 극명히 갈린 이유는 뭘까?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자 도제찰사였던 유성룡은 일본군의 침입을 만나자 즉시 ‘면천법’을 실시했다. 그 결과는 전쟁 초기 지배층이 도망가서 텅 빈 궁궐을 불태우던 민초들에게, 지켜야 할 나라가 생기게 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일본군을 격퇴하고 전쟁이 끝나고 나니, 승전의 공로는 중국군(명나라), 내시, 그리고 왕과 함께 도망갔던 고관대작들에게 돌아갔고, ‘면천법’은 폐기시켜 버렸다. 결과적으로 죽어라 싸웠던 서민들은 닭 쫓던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된 것이다.     


  나아가 국익 위주의 등거리 외교를 하던 광해 임금을 내쫓고는 신분제를 더욱 강화하는 ‘호패법’을 실시, 아주 높은 놈은 상아로(牙牌), 그 담 높은 놈들은 소뿔(角牌)로 만든 호패를 차고, 나머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木牌)를 차도록 했다. 딱 봐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게 한 것이다. 당시 호패 관련 시행령(號牌事目)에 따르면 ‘호패를 안 찬 사람은 목을 베어 매달아 전시하고, 숨겨준 자도 처벌한다’고 했다.

     

  이 와중에 정묘년, 병자년에 중국군(청나라)이 쳐들어오니, 의병은 고사하고 있던 군사들조차 호패를 풀어 성 위에 걸어놓고 퇴근했다고 한다. 장군복이 아무리 폼나고 계급이 아무리 높아도 벗어 논 호패가 중국군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①.     


한 번 절할 때마다 맨땅에 대가릴 세게 3번 박아야 한다. 그걸 3번 반복해야 한다. 상위에 상자는 임금의 상징인 '옥새'다. 병자호란 때 조선임금 인조가 중국왕에게 이렇게 했다.

  결과적으로 위선적인 지배계급의 이기적인 통치행위가 조선의 왕으로 하여금 맨땅에 아홉 번 헤딩하게 한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맨땅에 아홉 번이나 헤딩한 왕이나 그에 빌붙어 민중 위에 군림하던 지배층들은 반성은커녕, 신분제를 더욱 강화했고 그 결과 나라가 망했다. 하지만 그들(위선적인 지배계급)은 안 망했고 지금도 잘살고 있다.      



  『논어』를 읽다 보면 상아호패나 뿔 패를 찬 고관대작들 중, 사리사욕에 눈먼 무리들을 못마땅해하는 공자를 만날 수 있다. 공자는 이런 친구들을 자신과는 다른 ‘더런놈들(鄙夫②)’라고 했다.     


  비루한 사람과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을 것을 걱정하니, 만일 잃을 것을 걱정한다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후세 사람은 선비를 3등급으로 구분해 ‘도덕’, ‘명예’를 추구하는 선비와 함께 ‘부귀’를 추구하는 선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도덕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과 달리 부귀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는 ‘더런 놈’이라고 확인 사살을 했다④


  지금 만일 일본군이나 중국군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다면 의병이 일어날까? 북한은 어떨까? 공자가 우리나라에 태어난다면 우리나라 어느 정당에 가입할까? 우리나라 통치권에는 ‘더런놈들(鄙夫)이’ 없을까?


다른 건 몰라도 ‘못하는 짓이 없는(無所不至)’ 무리들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대문 그림 : 의병 상상도 (출처; 네이버, 검색일 2024.9.26.)


① 이덕일 지음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다산북스. 경기, 파주. 2011. pp. 197-208      


② 더런놈들(鄙夫)을 시골뜨기 또는 가난한 집 아이(苦孩子)라고 번역한 李零의 번역은 명백한 오역이다. ‘같이 임금을 모시는(可與事君)’ 동료 벼슬아치를 이른다고 보는 것이 맞다.     


③ 成百曉 譯註『顯吐完譯 論語集註』傳統文化硏究會. 서울. 1991. p.351. 본문은 다음과 같다. 鄙夫 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④ 위 책 같은 페이지. 본문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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