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길 위에서 살아온 나는 여러 나라말을 할 줄 안다. 읽고, 쓸 줄 아는 언어들도 있지만, 읽거나 쓰지는 못하고, 말만 할 줄 아는 언어도 있다. 뭐가 됐던 장사치의 말인지라 그다지 높은 수준은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나는 몽골에 도착하기 이전, 몽골어를 매우 쉽게 배우리라 확신했었다. 우선, 언어 감각이 탁월한 데다가, 한자를 알고, 한국어, 중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니 비슷한 동네 말이 뭐 어려울까라는 아주 무식하고 교만한 설레발이었다.
하지만 이런 초라니 방정이 여지없이 깨지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우선 몽골에서는 키릴 문자를 쓴다. 테트리스 게임을 할 때 가끔 나오는 이상한 알파벳이다. 물론 한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한자어가 있기는 하지만 한자어인지도 모르고 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없는 발음이 아주 풍부하다. 특히 숫자의 경우는 매번 다르게 말을 해 당최 적응이 불가능하다.
그뿐이 아니다. 생긴 것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삶의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그러니 같은 사물을 봐도 한 사람은 예쁘게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식욕을 느끼는 상황이 된다.
가장 황당하게 느껴졌던 것은 몽골에는 우리와 같은 성(姓)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은 물론 본(本)까지 있어, 누가 물어보면 “청주 한 씨입니다”, “광산 김가입니다”하면서 폼을 잡는다. 거기에 더해 웬만하면 유명한 시조(始祖 - 처음 그 성을 시작한 할아버지)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성은 모두 같다. 그런데 몽골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성이 모두 다르다.
몽골어로 성은 ‘Овог(어웍)’이라고 한다. 종족, 성씨, 씨족 등의 뜻이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즉 아버지의 이름이 내 성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흥보 아들이 철수고 철수 아들이 갑돌이라면, 흥보아들 철수의 full name은 ‘흥보 철수’가 된다. 철수 아들의 성명은 당연히 ‘철수 갑돌’이 되는 식이다.
따라서 몽골 여자의 성명은 남자 이름 하나, 여자 이름 하나가 더해져 구성된다. 예를 들면, 철수의 딸이 순희라면, 당연히 ‘철수 순희’가 성명이 된다. 그래서 철수의 아이들은 아들인 ‘철수 갑돌’과 딸인 ‘철수 순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이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함자(銜字) 또는 존함(尊銜)이라고 한다. 여기서 함(銜)은 입에 물리는 재갈의 뜻이다. 입에 뭘 물리면 당연히 말을 못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연히 아버지 이름과 같은 글자는 자손의 이름에 사용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꾸밈의 느낌과 중국 냄새가 나지 않는가?
결국은 우리와 방식이 다를 뿐이지, 몽골도 나름대로 성이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몽골의 방식은 훨씬 더 와닿는 무엇이 있다. 어찌 보면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진솔하고 정겹고 씩씩하다.
그들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위패에 한문으로 써서 어둑한 사당에 보관하는 대신에,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한 언제나 함께한다. 그리고 내 자식들은 항상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들은 천하를 집으로 삼는 유목의 삶에 맞는 성(姓)을 가지고 있다.
대문 그림 : '야크타고 노는 애' 라는 작품이다. 사진은 내가 찍었다. 몽골말 배우려고 빌빌거리고 몽골 국립대 무작정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찍었다. (20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