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밤을 갈아 넣어도 남는 것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하루는 끝난 듯 보인다. 그러나 내 하루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곤 했다.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집 안의 소음이 층층이 가라앉으면, 이제야 비로소 내가 배울 수 있는 시간대가 펼쳐졌다. 식탁 끝에 노트를 펼치고, 노트북 화면을 켠다.
화면 밝기를 가장 낮게 맞추고도 푸른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채운다. 익숙한 피로가 눈꺼풀 주변에 눌어붙은 느낌이지만, 그 피로가 밤의 문턱을 넘는 의식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사람들과 부딪히며 썼던 말들이 목 뒤쪽으로 몰려 어깨를 묵직하게 누른다. 하지만 손끝은 키보드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한 줄이라도 더.’
그 즈음의 나는 절박함과 설렘 사이에 서 있었다. 절박함은 현실에서 왔다. 회사의 스케줄은 늘 타이트했고,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내 삶의 속도는 누군가가 정한 표에 의해 움직였다. 그 틀을 깨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나를 안에서 밀어 올렸다.
‘언젠가는 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낮의 피로가 사라지지 않은 채, 밤을 새우며 새로운 걸 배우는 선택을 반복했다. 설렘은 배움에서 왔다. 알지 못하던 개념이 이해로 바뀌는 순간, 화면 속 문장이 내 말로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 교차로처럼 복잡했던 길이 한 방향으로 뚫리는 느낌. 그때마다 심장 아래쪽에서 가볍게 울리는 작은 북소리가 있었다.
온라인 비즈니스 관련 강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볼 것과 읽을 것을 나누었다. 브라우저에는 탭이 늘어났다. 전략, 마케팅, 기초 개발, 툴 사용법, 자동화, 분석. 탭은 많아졌고, 머릿속은 가끔 버벅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귀는 더 잘 들렸다. 키보드의 규칙적 두드림, 냉장고 모터가 켜졌다 꺼지는 소리, 가끔 아들이 게임하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소리. 이 단조로운 생활 소음이 나에게는 박자였다. 그 리듬에 맞춰서 문장을 읽고, 메모장을 열고, 다음 강의로 넘어갔다. 단순한 루틴이지만, 그 루틴이 없었다면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할 순간을 밤마다 뒤로 밀었다. 새벽을 가까스로 건너온 뒤에야 자리에 누웠다. 수면은 길지 않았다. 세 시간, 길면 네 시간 남짓. 잠깐의 깊은 잠에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몸이 툭 하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알람이 울리면, 눈을 감은 채로 당겨 붙들곤 했다. 몸이 버거운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그 다음 장을 펼치고 싶어 했다. 다음 강의, 다음 실습, 다음 시도. 지쳐서 그만두자는 마음과, 여기서 끊으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다는 마음이 서로 밀고 당기는 구간. 그 밑바닥에서 나는 내 쪽으로 조금씩 당겨왔다.
몸은 정직했다. 야근에 이어 밤 공부까지 붙이면, 다음 날 오전엔 기억이 틈틈이 끊겼다. 커피 흘린 자리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면 표면이 끈끈했다. 컴퓨터의 팬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가 있었다. 버스 좌석의 비닐 냄새, 지하철 손잡이에 남은 세제 향, 회사 복도 카펫 위에 얇게 깔린 먼지 냄새. 이런 미세한 감각들에 내가 과민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곤하니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그러나 그 예민함이 나를 완전히 꺾진 못했다. 작은 루틴이 나를 잡아끌었다.
루틴의 핵심은 ‘작게라도 매일’이었다. 강의 한 편을 끝내지 못하더라도, 노트에 키워드 몇 줄을 적는 것. 노트를 넘길 때 종이에서 나는 얇은 마찰음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날 이해한 문장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다음 날 그 동그라미를 보면, 어제의 나에게서 지금의 내가 작은 신호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해가 또렷해지는 날도 있었고, 원위치로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진도가 뒤로 미끄러졌다. 그래도 루틴은 멈추지 않았다. 뒤로 미끄러져도 다시 오면 된다. ‘매일’의 힘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있었다.
아이들이 잠들 무렵이면, 집은 잔잔한 물처럼 고요해졌다. 그때가 내 공부의 황금 시간이었다. 부엌에서 끓는 물 소리, 컵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 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를 조금 기댄 다음, 손목을 풀어주면 손끝에 체온이 돌아왔다. 처음엔 화면의 밝기가 눈을 찔렀다.
점점 익숙해지면 주변이 컴컴해도 글자는 선명했다. 그 몇 시간은 내게 대여된 자리 같았다. 낮의 나는 회사라는 큰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돌아가지만, 밤의 나는 내 톱니바퀴를 꺼내 들 수 있었다. 아주 작은 톱니라도, 매일 돌리면 방향이 잡혔다.
물론 대가도 있었다. 몸의 신호를 무시하면, 어느 날엔 감기처럼 피로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관절이 굳고, 목덜미가 묵직해졌다. 그럴 때는 억지로 이어 붙이지 않았다. 억지로 하면 오히려 길이 끊어진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쉬는 날엔 정말 쉬었다.
그러나 쉬는 날에도 루틴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강의 대신 가벼운 글을 읽거나, 짧은 노트를 남기거나, 평소에 저장만 해뒀던 링크를 열어 첫 문단만 확인했다. ‘완료’가 아니라 ‘관계 유지’가 목적이었고, 그게 다음 날 다시 연결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공부가 버거운 이유는 대부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질문 앞에서 길을 잃기 때문이다. 그런데 IT는 달랐다. 맞는 공부는 재밌었다. 코드 한 줄이 화면의 반응을 바꾸는 순간, 숫자 몇 개가 그래프의 흐름을 뒤집는 순간, 배운 개념이 현실의 문제를 깔끔하게 설명해 주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딱’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연결이 보이면, 피곤이 줄었다. 예전엔 설명을 못 하던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히 보상이 되었다.
요즘은 AI를 배우는 시간이 늘었다. 처음에는 용어들이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벽은 가까이 갈수록 표면이 보였다. 어려운 단어도 반복해서 부딪히다 보면 질감이 익었다. 종이에 써보면 한층 더 느리게 들어왔다. 꾸준히 접하면 무겁던 단어들이 무게를 잃었다. ‘이건 내 영역이 아니야’라는 방어적 마음이 ‘이건 아직 내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거야’라는 태도로 바뀌자, 학습 속도도 달라졌다. 스스로 번역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가 됐다.
영어는 습관으로 잡았다. 밤 공부가 끝나갈 무렵, 듀오링고를 켜고 짧게라도 문제를 풀었다. 너무 하기 싫어 귀찮을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매일 내 휴대폰을 통해 귀엽게 협박하는 아이콘이 뇌를 가볍게 두드렸다. 길게 하기보다 매일 하는 게 핵심이었다.
‘오늘도 1칸 전진.’ 스트릭이 쌓이면 화면에 작은 불꽃이 켜졌다. 그 불꽃은 내 생활의 구멍을 메우는 봉합선 같았다. 큰 성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런 작은 성취의 물방울이 모여서 웅덩이가 됐다. 그리고 언젠가는 작은 웅덩이가 연결되어 흐름이 됐다.
유튜브는 나에게 교과서이자 창문이었다. 온라인 관련 공부는 채널 몇 개를 고정해 두고, 업로드 알림을 받았다. 파트별로 필요한 영상만 골라봤다. 영상의 속도를 1.25배로 올려 보다가, 이해가 안 가면 0.75배로 낮췄다. 가끔은 같은 영상을 하루에 세 번도 반복했다. 반복은 지루함을 부르지만, 동시에 안전망이 되었다. ‘모른다’는 낙인을 ‘아직 안다’로 바꾸는 시간이었으니까.
여행 채널은 내게 다른 성격의 자극을 줬다. 도시의 공기, 사람들의 표정, 길가에 놓인 간판과 가게들. 미지의 곳이 화면 속에서 익숙한 느낌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았다. 그걸 보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저 풍경 속을 걸으면서, 배운 기술로 내 일의 경로를 만들겠다고.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배워서 남는 게 있고, 남은 것이 길을 만든다.’ 배우는 일은 내게 살아 있는 증거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누군가가 만든 일정 안에서 보낼 때, 배우는 시간만큼은 내가 시간을 만든다는 감각이 있었다. 그 감각이 마음의 체온을 올렸다. 체온이 오르면, 다음 날의 피로가 조금 덜 무겁게 느껴졌다. 절박함과 설렘이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느낌. 한쪽만 있으면 오래 못 간다. 둘이 함께 있어야 오래 간다.
직장보다 ‘내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상황에서 나왔다. 회사는 안전했고, 급여는 일정했다. 그러나 그 안전함이 때로는 내 속도를 제한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 동안, 나는 그 안전함을 택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가 자랐다. ‘바깥의 안전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드는 안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가능성에 내 시간을 조금씩 나눠 주었다. 그게 밤 공부였고, 작은 실험들이었다.
실험은 실패를 기본값으로 붙이고 왔다. 어떤 건 바로 막혔다. 어떤 건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음 날 다른 각도로 보니 길이 났다. 기록을 남겼다. 잘된 것, 어긋난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까지. 기록은 성공의 목록이라기보다, 감정의 흔들림을 안정시키는 기둥이었다. ‘오늘도 뭔가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완성보다 쌓임. 결과보다 방향. 속도보다 지속. 이렇게 적어 두면 상투적 문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문장들이 야간의 내 작업대를 지탱했다.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면서, 나는 배움의 의미를 다시 정의했다. 아이들은 이제 빠르게 자라서 그때와 달리 각자 주장과 속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멈추지 않는 어른’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늦은 밤 노트를 펼친다.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으로 바꾸고, 아는 것을 내 언어로 옮기고, 옮긴 것을 작은 시도에 연결한다. 대단한 성과가 아니어도 된다. 다만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이면 된다.
무알콜 맥주를 한 모금 마실 때의 미세한 탄산 소리, 키보드의 얇은 클릭, 핸드폰의 조용한 진동. 생활의 사운드트랙이 귓속에 낮게 깔린다. 창밖에서 가끔 바람이 불면, 베란다 문틈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가 난다. 그 떨림이 내 심장 박동과 겹쳐질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짧게 중얼거린다.
‘오늘도 한 칸.’ 이 한 칸이 모여서 내 일을 만들고, 내 일이 모여서 우리의 시간을 만든다. 언젠가 내가 만들 결과물의 윤곽을 지금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안다.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방향이 맞다면, 속도는 언젠가 따라온다는 것을.
가끔은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다. 머리는 예전보다 하얗고, 몸은 예전보다 느리다. 하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또렷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사람의 눈빛은 나이를 먹어도 흐려지지 않는다. 그 눈빛을 아이들이 본다면 좋겠다. ‘아빠는 나이가 들어도 배우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기 길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의 배경 어딘가에 내 밤의 불빛이 작은 힌트로 남아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나는 오늘도 책갈피를 한 칸 옮기고, 짧은 영어 문제를 풀고, 강의의 핵심을 노트에 두 줄로 요약한다.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소리 내어 읽는다. 뜻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복도 끝을 천천히 걸으며 리듬을 찾는다. 리듬이 생기면, 문장이 움직인다. 문장이 움직이면, 마음이 움직인다. 마음이 움직이면, 내일의 발걸음이 덜 무겁다. 그렇게 나는 내일로 간다. 절박함과 설렘, 두 감정을 나란히 데리고.
― 배움은 밤을 갈아 넣어도 남는 것, 평범한 하루를 작은 승리로 바꾸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