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공허함은 하루의 기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빛
밤은 언제나 생각보다 길었다. 가족들이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간 뒤, 거실은 금세 텅 빈 공간이 되었다. 조용히 켜둔 스탠드 조명 하나, 그리고 벽에 등을 붙이고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쇼파도 아니고 침대도 아니었다. 그저 차갑고 단단한 벽.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벽에 기대는 순간,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가 밀려왔다. 차갑지만 묵묵히 내 몸을 지탱해 주는 벽은 마치 오늘 하루를 견뎌낸 나를 위로라도 하듯, 무심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감으면, 온갖 생각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오늘도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 못했다. 서로의 시간이 달라서였다. 아들은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둘째는 게임이나 친구와의 약속으로 바쁘다. 아내 역시 집안일과 자기 시간을 챙기다 보면, 함께 식사를 맞추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예전에는 하루의 고단함을 나누던 따뜻한 밥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각자 다른 시간에 밥을 먹고, 다른 공간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어쩌면 서로의 삶을 조금씩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무기력은 서서히 나를 잠식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몸은 의자에서조차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은 늘 불안정했고, 머릿속에는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발걸음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들어 유튜브 영상을 몇 개 재생하다 보면, 잠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화면이 꺼지고 불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더 큰 공허가 찾아왔다. 그 공허는 내 어깨를 누르고, 심장을 옥죄며, 다시 벽에 몸을 기대게 했다.
나는 종종 내 자신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지쳐 있는 걸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드는 걸까?"
답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은 건, 무기력은 단순히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 많은 책임과 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 생겨난 감정이었다. 그 막막함이 나를 짓누르고,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에 기대 앉아 있을 때 문득 들려오는 가족들의 작은 소리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들이 방문을 열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소리, 아내가 방 안에서 흘려보내는 웃음소리, 동생들끼리 장난을 치며 오가는 작은 말소리. 그 사소한 소리들이 어둡고 공허한 거실을 채웠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저 작은 소리들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고, 무기력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었다.
공허함은 늘 무서운 감정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정적은 때로 나를 삼켜버릴 듯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새로운 의미를 찾기도 했다. 공허함은 나를 멈추게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이런 질문들이 공허한 밤을 채우며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 답을 찾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내일을 향한 작은 용기를 주었다.
때로는 과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아무리 고단해도 꿈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날들. 하루 3~4시간만 자며 공부하던 시절의 열정. 농구공을 쥐고 땀을 흘리던 대학 시절의 활력. 그리고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함께 공원에서 뛰놀며 웃음을 나누던 순간들. 그 기억들이 불쑥 떠올라 나를 위로했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버텨냈고,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공허함은 나를 시험했지만, 동시에 내 안에 남아 있는 힘을 확인시켜 주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나는 알게 되었다. 무기력과 공허함은 결코 나를 끝내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것은 멈춤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였다. 벽에 기대어 흘리던 깊은 한숨조차, 언젠가 돌아보면 나를 지켜낸 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무기력과 공허함 속에서도 하루를 살아내자고. 공허한 밤을 지나고 나면, 아침 햇살이 다시 창문을 두드릴 테니까.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나는 또다시 가족과 웃음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 평범한 하루가 주는 기적 같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버티고 있다.
― “무기력과 공허함은 나를 멈추게 하는 벽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의 기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