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타자

by 휘루 김신영

< 아직도 타자>

여성은 집합 개념으로서 여성인 경우가 많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당해야 하는 구조적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성들과 대결을 하거나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권리와 위치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불평등과 인권침해를 여기저기서 많이 만난다. 심지어 2020년대의 초중고 교과서에서도 만나며, 교실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로부터도 만난다. 한 학생이 말한다. 제발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고 폄하하며 욕질을 하는 학생을 처벌해 달라고, 그리하면 대부분의 선생님은 ‘너희들의 복장이 문제다’라든가 ‘앞으로 동아리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학생들의 말이 낯설지가 않다. 내가 중고교를 다니던 80년대에도 그런 선생이 대부분이었는데 아직도 그렇단 말인가? 아직도 바뀐 게 없다는 말인가?


시몬느 드 보봐르는 <제2의 성>의 서론에서 논점으로 제시하는 화두로 여성들에게 ‘여자다워라, 여자가 되어라’는 등의 말을 들으며 자란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오늘날 여성에게 일정한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그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은 길러진다는 것이며 여성다움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여성으로 길러진다는 것이다.


“여성은 타자(他者)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여성을 본질적인 존재가 아닌 비본질적인 존재로 보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남성은 주체이며 절대이고 여성은 타자가 되는 현실이다. 타자(Autre)란 성의 구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 현상이다. 남성과는 다른 종속적이며 부수적인 여성이라는 테두리에 한정 지워지고 구별되어 온 타자, 이에 남성은 곧 인류와 공통어가 되지만 여성은 인류가 아닌 타자적 존재로 치부된다. 그림 프리다칼로 <Self-Portrait with Cropped Hair> (1940)

여성의 여러 상황에서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가 아니라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철학은 특히 여성에게 유의미하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사회적이다.


보봐르는 노년이 되어서야 얻은 여성들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외친다. 혈기왕성한 시간에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는 것.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기투해야 한다. 또한 여성은 타자인 것을 인지하고 저항해야 한다.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천명한 보봐르는 생물학적 특성이 본질이 아닌데도 본질로 왜곡되어 있어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 결국 여성은 본질에 앞서 존재해야 함을 설파한다.

또한 여성은 성장하면서 체득되는 열등감과 패배주의를 벗어나 자신을 기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을 기투하는 행동은 피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피투를 넘어 기투하여 초월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그 자신이 아니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조화된 사회에서 여성이 부수적으로 취급되고 있다면 의도한 바가 아니더라도 여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른다. 따라서 타인과의 상호인정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며 이에 서로 긴밀하게 연대하는 적극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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