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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창고비를 먹어치우니

by 휘루 김신영

시집이 창고비를 먹어 치우니

김신영



가난한 시인이라 시집을 내 줄 수 없다고

탯줄을 잡고 태클을 걸었다는 괴이한 말

가난의 꼬리가 우주 끝까지 따라다닌다니 선겁다


사람 사는 일이 모두 가난인데

그깟 가난 때문에

시집을 내줄 수 없다는 거대한 오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성선 시인은 <별을 보며>라는 시에서

별을 보는 황홀한 가슴은

‘무엇으로 가난하랴’고 쓰고 있는데


어느새 출판사 사장은 가난이 무엇인지

자본으로 자를 재며 들먹들먹 가난을 모르는자

시집출판을 미루려고 쌩떼를 썼다지


그렇게 <마술상점>은 출생부터 고난의 기록

인쇄기에 걸려, 자궁 문턱을 넘는 출생의 순간에

그가 다시 자궁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것

책을 다시 자궁으로 밀어 넣으며

나오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고


가난한 시인의 자궁문을 지키는 너는 누구냐

그의 엄포에 엄마처럼 우주와 우주의 계약을

굳게 지키던 주간은 사표를 내고

투자한 돈은 절대 내줄 수 없다고 꿀꺽 삼켰다지


가난은 시인의 독고다이

<마술상점>은 예정일에 간신히 태어나

샛노란 포효의 울음도 무색하게 탯줄을 달고

창고 깊숙이 처박혀 사생아처럼 내팽개쳐졌다


그렇게 3년이 흘러 늦은 걸음마를 걸을까

시집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는데

시집이 창고비를 먹어 치우니 그만 폐기하든가

가져가든가 하라는 기막힌 말

선겁게 다시 들려와


가난한 시인은 <마술상점>을 모두 끌어 안고

깊은 잠에서 깬다. 내 시집을 독립운동하듯이 모조리 부활시키리


집안 가득히 점등인의 노란 불이 들어와 환히 켜지고

380개의 등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100개의 노란 등이 남아 가난한 시인의 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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