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 H. 로렌스의 <무지개>에 대하여
우리 일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말할 것도 없이 일과 결혼이다. 그러기에 많은 작가들이 결혼, 혹은 사랑을 주제로 숱한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남녀 관계의 문제를 가장 깊이 천착한 대표작가로 우리는 D. H. 로렌스를 들 수 있다. 그의 처녀작인 <아들과 연인>에 이어 2년 만에 내놓은 <무지개>와 <사랑하는 여인들>, 마지막 작품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도 로렌스는 거의 남녀 관계의 문제만을 집요하고 여일하게 다루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 사회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여권운동이 활발했던 시대이다. 당시 교사였던 로렌스 역시 여권운동 행사에 참여하는 등 관심을 보였는데, 이즈음 그는 교직 생활을 포기하고 문필 생활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을 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교수의 아내인 프리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남성을 압도할 만큼 자의식이 강하고 열정적인 프리다와 로렌스는 이후 독일로 도피, 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도보 여행을 하고 이탈리아에 정착한 다음, 이 년 뒤 정식 결혼에 성공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나온 소설이 <무지개>(1912)이다.
<무지개> 속엔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로렌스 개인의 격렬했던 체험이 진하게 베여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어슐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생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진취적인 신여성으로 어느 누구보다 열렬하게 자아 실현으로의 길을 지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저 먼 하늘 위 무지개 빛, 궁극의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인공 어슐라는 이 장편소설 중반부 즈음에 가서야 등장하기 시작한다. 앞부분은 그녀의 조부모의 결혼생활과 부모의 결혼생활이 주요 내용을 이루는데, 이것은 물론 어슐라라는 여성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두 부부의 결혼생활은 그 자체로 각각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남녀 관계의 또 다른 두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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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세대 동안 마시 농장에서 살아온 브랑윈 집안사람들은 금발에 활력이 넘치고 천성이 부지런해 대지와 교류하며 풍족한 삶을 누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늘 이런 본능적인 삶 그 너머의 세계를 동경해 왔다. 그중 막내아들 톰은 천성이 공부에는 맞지 않았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남자로 열여덟 살부터 농장 관리를 맡아 정력적으로 일을 해왔는데. 결혼을 하고 싶어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던 그는 마차를 타고 목사관에 하녀로 오고 있는, 폴란드 미망인 리디아를 보고 한 순간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처음으로 낯선 집에 와 버터를 빌리면서도 당당하고 초연한 듯한 그녀의 태도에 압도당한 톰. 자기 집에 있으면서 ‘마치 자기가 그 여자를 위해 그곳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드는데. 이제 그녀 없이는 자신은 무(無)라고 느낄 정도로 사랑에 빠진다.
한편 주인공 어슐라가 어릴 적 무척 따랐던 조모인 리디아. 그녀는 폴란드 의사이자 독립 투사였던 전남편 폴 렌스키와 함께 간호 일을 배우면서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만, 폴은 그녀를 독립된 한 개체로 인정하지 않고 종속된 존재로만 여길 뿐이었다. 점점 더 정신적인 이념 추구에만 열중하게 된 폴이 런던으로 도피해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다 사망을 하자, 이곳 마을 목사관에 오게 된 리디아는 전남편과 달리 순박하고 건강한 생명력의 소유자인 톰이 청혼을 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담담히 말하며 그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결혼 후, 차츰 과거를 망각하며 톰에게서 안정감을 느끼며 사는 리디아. 한편 톰은 귀가할 때마다 심오한 미지의 세계로 가는 사람처럼 기대에 차는데. 리디아가 자기에게 속해 있고, 자신이 그 여자에게 속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행복에 젖는 톰은 결혼생활이라는 삶의 위대한 근원을 몸으로 체험하고 만끽한다.
하지만 이따금 옛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아내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는 톰. 과거를 알 수 없는 아내에게서 소외를 느끼는 톰은 곧잘 그녀가 진정으로 자기 곁에 끝까지 아내로 남아있어 줄 것인지 의구심을 가지며 자기 비하감에 빠지곤 한다. 이처럼 톰은 리디아의 독특한 개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더불어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차츰 침묵과 거리가 두 부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렇게 자기를 혼자 내버려 두는 아내를 미워하며 아내가 자기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한다고 속으로 분노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리디아가 남편에게 진심을 토로한다.
“당신은 나의 관심을 충분히 못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아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끔 무슨 노력을 해봤나요?”
자기의 속마음을 그토록 태연스럽게 들추어낼 수 있는 아내를 경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고만 있는 톰.
“왜 당신은 나에게 만족을 못 하지요? 전남편 폴은 사나이답게 나에게로 와서 나를 취하곤 했어요. 한데 당신은 나를 외롭게 홀로 두던가, 아니면 내가 가축인 양 빨리 취하고는 다시 나를 잊어버리지요.”
“당신이야말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양 느끼게 해요.”
“이쪽으로 와요.”
톰이 다가가자 여보!, 하고 부르며 두 팔로 남편을 감싸 안는 리디아. 이제서야 그의 억눌린 욕정이 풀려난다.
이렇듯 위기를 극복한 두 사람의 결합은 전보다 훨씬 더 멋진 관계로 나아가고, 톰은 자기의 길을, 아내도 또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개별성을 인정하고 서호 상호간의 매력을 인지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만족스런 결혼 생활을 이루어낸다.
한편 톰은 리디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애나에게 차츰 자기의 남은 에너지를 쏟는데. 애나 역시 성장해 감에 따라 아버지 톰을 눈에 띄게 사랑한다. 톰 역시 다른 애들에게는 별 관심 없이 외톨이로 농장을 뛰어다니는 도도하고 영리한 딸인 애나를 마음속으로 숙녀로 키우겠다는 욕망을 갖는다. 하지만 애나는 사춘기를 맞아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톰은 노팅엄에 사는 숙모로부터 초보 도안사인 아들 윌리엄을 당분간 돌봐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교회와 교회 건축에 흥미를 갖고 있고, 목각을 다듬어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윌은 애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멋진 음성을 가진 윌을 애나 역시 사랑하게 된다.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 두 사람.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몇날 며칠을 신혼집 안에서만 보내는데. 하지만 그 뒤, 곧바로 첫 다과회를 여는 등 극성을 떠는 아내를 보며 침울해지는 윌. 아내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며 침착성을 잃기 시작한다. 옆에서 아무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남편을 참을 수 없는 애나와 그런 아내를 증오하는 윌 사이에 수시로 애정과 증오가 교차하는데. 윌은 결국 도안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지만, 애나는 그의 그런 생활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결정적으로 넓혀놓은 건, 바로 교회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였다. 교회에서 무한한 절대자를 체험하는, 암흑의 정서에 열정을 느끼는 윌과 달리 애나는 교회의 설교와 성경 이야기를 현실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하지만 격렬하게 싸우다가도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그의 마음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달아오르곤 하는데.
이런 식으로 이들 부부 사이엔 하루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이튿날엔 다시 모든 것이 경이로워지는 사랑과 갈등이 반복되는 관계가 지속된다. 윌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부부는 상보적이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존재라는 걸 명확히 느끼고. 그는 아내가 자기의 일부가 되어주기를 원하지만, 아내는 자기를 그저 지배하려고 한다고 느낀다.
시간이 가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별개의 존재로 남아 있는 두 사람. 마침내 애나도 지치기 시작하고. 이제 그녀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수동적이 되어 남편에게서 완전히 동떨어져 나간다. 즉 자기와의 관계를 넘어서서 남편이 그 자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애나의 영혼은 남편 곁을 떠나 자기만의 길을 걷고. 한편 윌은 아내가 자기의 생각을 말로 잘 표현할 줄 모르고, 사고가 둔한 자기의 영혼을 빈정댄다는 사실 때문에 격분한다. 또한 지식을 숭상하고 인간 지성의 전능한 힘을 믿는 애나 역시 남편과 언쟁을 벌일 때마다 승리하지만 내적으로는 깊은 고독을 느낀다.
하지만 애나는 아이를 통해 남편과 결합함으로써 가슴속 공허감이 채워지길 갈망하고, 결국 그들 부부는 다시 친구가 된다. 그들은 다시 잠자리를 함께 하지만, 전과는 달리 아주 조용히 떨어져 잔다. 이제 드디어 혼자 지낼 수 있게 된 윌. 아내를 필요로 하고 아내에게 의존했던 자아에서 벗어나 마침내 별개의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중년이 된 애나의 영혼은 처녀시절처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객이 아니라 모험을 포기하고, 자기 집에 만족스럽게 머문다. 모성적 소유 의식이 강하고 자식들을 낳고 기르면서 커다란 성취감을 맛보는 애나에게는 삶의 원초적 활기와 기운이 흘러넘친다.
이처럼 두 부부는 빛 가운데서는 별개로 떨어져 있다가 짙은 어둠 속에서는 굳게 결합했다. 남편은 아내의 낮 동안의 권위를 지지해 주었고, 아내는 암흑 속에서는 남편에게 예속됐다.
주인공 어슐라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두 부부, 각각의 관계에 대해 정리해 보자. 자기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던 톰은 당당하고 신비스러운 여인 리디아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삶의 위대한 근원인 결혼생활의 매력과 힘을 온몸으로 만끽하지만, 아내를 잘 알지 못한다는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데. 하지만 아내의 따뜻한 포용력으로 다시 화해하고 서로의 개별성을 인정함으로써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이와는 달리 영리하고 고집 센 애나는 종교와 교회 건축에 열정을 품은 윌을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지성만을 내세워 남편의 어두운 감정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서로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다행히 아이들이 두 사람을 맺어주고, 밤과 낮의 권한을 서로에게 각각 위임함으로써 그런대로 삶의 균형을 잡아나간다.
이처럼 리디아와 톰 부부는 시대적 한계와 외국인이라는 제약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해 줌으로써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반면에, 애나와 윌 부부는 각자의 고집으로 인해 서로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애나의 자아가 윌의 자아를 압도함으로써 그리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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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 어슐라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되고, 우리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큰 딸 어슐라는 처음부터 젊은 아버지 윌의 마음에 깊고 강렬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딸에게 재미있는 놀이들을 다 가르쳐 주며 함께 노는 윌은 이 딸에게 모든 희망을 건다. 한편 아버지의 귀가 시간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힘이요, 대자아였다. 아이는 아주 일찍부터 자신의 정신을 단단하게 하여 바깥세상의 모든 것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것을 빨리 배우고 지적이면서도 본능적인 어슐라. 차츰 궁극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그녀의 가슴속에는 먼 곳을 보고픈 경이로운 열망이 차오르는데. 사춘기에서 숙녀기로 접어든 어슐라. 자기 삶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의식함과 동시에, 신앙심이 갖는 달콤한 감상주의(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자기의 미숙한 감정을 위무 받으려는 태도)를 자각, 이를 배척하며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이 무렵, 어슐라는 삼촌이 데리고 온, 청년 스크레벤스키를 만나게 된다. 휴가를 받아 나온 공병대 군인인 그는 그녀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안겨주었고, 그의 단도직입적이고 침착하고 귀족적인 태도 역시 그녀의 마음을 끈다. 한편 당시 매우 아름다운 어슐라는 그에게 욕정과 고통을 안겨 주고.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 불장난인 것을 알면서도 어슐라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으로 그와 키스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한 존재(무한히 사나이답고, 무한히 탐스러운 존재)임을 느끼며 황홀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덕 위 어둠 속 달빛 아래 달님과 자유롭게 충일한 교감을 나누는 어슐라와 다르게 그의 영혼과 몸은 위축되고. 이 순간 어슐라는 그의 키스를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그가 결코 그녀 존재의 핵심을 건드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그녀의 영혼은 텅 비고 끝장 난 듯했다. 한 개인의 영혼을 진정으로 중요시하는 그녀와 달리 그의 자아는 산업화된 세상의 정립된 질서 속에 한 부품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어 그는 휴가를 끝내고 기차를 타고 떠난다.
이제 완전한 자립을 위해 경제적 독립을 꿈꾸는 어슐라. 온순하고 수동적인 양과 활기 없는 비둘기보다는 자부심이 강하고 강인한 사자나 독수리가 되고 싶어 하는데. 한편 여자 체육교사인 잉거 선생의 강렬한 애정을 받고 급성장을 한 어슐라는 잉거 선생이 독신인 자기 삼촌과 결합하기를 바란다. 잉거 선생과 함께 방문한, 삼촌이 살고 있는 탄광촌의 비참함을 목격한 그녀는 그곳을 관리하는 삼촌이 섬기는 것은 물질적인 기계일 뿐이라며 비통해한다.
학교를 마치고 결혼 적령기를 앞둔 어슐라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녀는 엄마의 삶에 대한 무사 안일한 태도에 혐오감을 느끼며 우선은 자격증 없는 교사가 되고, 그 다음에는 교육전문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기로 마음먹는다.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할 수 없이 가까운 일커스턴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가 된 어슐라. 첫날부터 독단적이고 무자비하게 권위적인 하비 교장과 마찰한다. 부푼 꿈을 안고 온정적인 교사가 되려하지만 번번이 좌절하는 어슐라에게 브런트 선생은 엄하게 반을 다스려야 한다며 따끔하게 충고한다. 오로지 적개심과 굴종이 지배하는 학교 분위기에 짓눌린 어슐라. 당장 학교를 떠나고 싶어 갈등하지만, 만약 여기에서 굴복하면 평생 자신이 남성 세계에서 절대 해방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교사생활을 힘겹게 이어가는데. 기어이 문제아 윌리엄스를 만나 위기에 빠진다.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자기를 조롱하며 힘으로 반항하는 그에게 어쩔 수 없이 회초리를 드는 어슐라. 결국 몇 명의 남학생들의 기를 더 꺾고 나서야 겨우 기강이 잡히는데. 이렇게까지 스스로 잔인스러워져야 하는지 회의를 하면서도 때로 가르친다는 일에 몰두하면서 즐거움도 느끼게 된 어슐라는 끝까지 자기 임무를 무사히 마치자 뿌듯함을 느낀다.
‘가르치는 일에서 결국 승리를 거두었구나. … 이곳에서 우리는 선한 싸움을 했고, 통틀어 볼 때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이제 어슐라는 학교가 자기의 영혼을 단단하게 자립적으로 성장시킨 감옥이었다고 스스로 규정짓는다.
한편 노팅엄의 미술 수공 교사가 됨으로써 드디어 사회적으로 떳떳한 인물이 된 아버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어슐라. 그로 인해 가족 모두 신흥 교외 주택가로 이사하게 되고, 어슐라는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기를 맞이한다. 대학을 지식의 성직자들의 성소로 생각하며 꿈에 부풀었던 어슐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실망을 느끼는데. 대학이 단순한 직업 양성소로, 즉 물질적인 성공이라는 신의 아첨꾼으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해 분노한다. 그나마 식물학 실험실에서 겨우 정신적 만족을 구하는 어슐라.
대학 최종 학년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어슐라는 갑자기 그동안 통 소식이 없었던 스크레벤스키로부터 노팅엄에 들릴까 한다는 편지를 받는다. 자기도 모르게 흥분을 느끼는 어슐라. 말타기의 명수인 그를 만나 균형 잡힌 육체에서 풍기는 자신만만한 분위기에 매혹을 느끼지만, 동시에 단지 동물적 욕망만이 가득한, 그의 정신은 오히려 더 흐리멍텅해졌다는 걸 간파한다. 어슐라는 인도로 발령 받아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그 말 속에서 옛 문명에 군림하는 지배계급의 한 사람으로 나약한 대중들을 거느리고 행세하는 귀족이 다시 되고 싶어 하는, 그의 숨은 욕망을 읽어낸다.
하지만 뿌리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인 그의 육체에 욕망을 느끼는 어슐라. ‘모든 일 뒤에 항상 당신이 버티고 있어 당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며 그녀를 원하는 그에게 키스를 허락하고, 두 사람은 관능적인 쾌락에 빠지는데. 드디어 어슐라에게 청혼하는 스크레벤스키. 하지만 어슐라는 선뜻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 앞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스크레벤스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자궁이 불타는 듯 아파오는데. 하지만 그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기에 어떤 경우에도 그가 자기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물론 그의 경탄할 만한 육체에 대해 열정을 느끼지만, 가공할 만한 경이감이라든가 미지의 세계와의 연대감, 혹은 사랑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지는 못하는 어슐라. 두 달 뒤, 인도행 배를 탈 그는 초조하게 어슐라 곁을 따라다니고.
그 와중에 어슐라는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그래도 중급 문과 시험에는 합격해 중학교에 교사 자리를 얻을 수가 있어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데. 인도로 떠나기 전 링컨션 해안 방갈로에서 열린 커다란 파티에 초대된 두 사람. 곧 결혼할 사람이라며 귀빈 대접을 받아 방을 따로 배정받는다. 어두운 밤, 밖으로 나가 모래톱 사이 움푹 패인 곳에서 욕정을 불태우는 스크레벤스키. 하지만 밤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과 자아 성취에 대한 끝없는 기대감으로 고통을 겪는 어슐라. 그녀가 잘 알고 좋아하며 매력적인 스크라벤스키가 옆에 있어도, 그의 영혼은 그녀를 포용하지 못하고.
달빛 아래 그녀에게 다시 거칠게 달려드는 스크레벤스키. 사랑 행위를 끝내며 몸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반응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것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는 재빠르게 목전의 일에 관심을 돌려 하루 빨리 대령의 딸과 결혼하리라 결론 내린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자마자 바로 그녀를 만나러 간 스크레벤스키. 첫 날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주에 새 아내와 함께 인도로 떠나버리는데.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어슐라.
한편 기진맥진해 집으로 돌아온 어슐라는 가족에게 파혼 사실을 알리고. 식구들은 어이가 없어 하며 화를 낸다. 냉담한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어슐라는 갑자기 몸의 변화를 감지한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며 당황하는 그녀. 이제 어슐라는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생각을 바꾼다. 그 실체가 불확실한 자아보다 매일의 생활이, 훌륭한 아내로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육체적으로 사랑받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생활이 터무니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보다 이상적인 삶이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어슐라. 옆에서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단순하게 주어진 삶을 감수하는 게 옳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스크레벤스키에게 자기 심정의 변화를 편지로 알린다.
어슐라는 그가 자신을 받아주리라 확신하지만, 마음속에서 조금씩 알 수 없는 반항심이 이는 걸 느끼며 이를 억누른다. 그러던 10월 초순 어느 오후, 집안에서는 금방 질식할 것만 같아 숲속으로 달려나갔다. 갑자기 질풍이 몰아치기 시작해, 늪지대 너머 오두막 지붕 밑으로 들어선 어슐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황야 한가운데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 몇 필의 말들이 얼핏 보여 돌아가려는 순간, 어느새 지축을 뒤흔들며 다가오는 말발굽의 진동 소리. 그녀 앞에 길을 막고 선 말들. 일순 뒤로 물러섰다가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가는데. 번개 같은 것을 맞았다 하는 순간, 말들이 양쪽으로 그녀의 몸을 통과해 지나가고. 하지만 아직 저만치 서 있는 말들. 통나무 다리 위를 걸어가는데 다시 달려와 그녀를 노려보며 서 있다. 겨우 용기를 내 말들을 통과해 신작로에 들어선 어슐라. 또다시 뒤에서 말들의 우레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옆구리를 스쳐 지나 다시 그녀 앞에 버티고 선 말 떼. 용기를 잃은 어슐라. 몸을 부르르 떨며 말들을 피해 돌아가는 체하며 걸어가다가 갑자기 쏜살같이 달려가 울퉁불퉁한 떡갈나무 위로 기어오르는데. 말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자 생울타리 안쪽으로 훌쩍 뛰어내리고. 생울타리 모퉁이에서 다시 멈추고 선 말 떼. 가시나무에 등을 기댄 채 꼼짝 않고 서 있는 어슐라.
한참 뒤,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가시나무 등걸위에 오랫동안 누워 있던 어슐라는 지친 상태로 마침내 집에 도착한다.
2주 동안 어슐라는 굉장히 앓았다. 헛소리를 하고 오한에 떨면서도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사실만을 계속 의식했다. 과연 내가 스크레벤스키에게 속해야만 하는 건가? 무언가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지만, 그건 진실 같지가 않았다. 분명히 어떤 굴레가 자기에게 들씌워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아기였다. 아기가 그녀를 스크레벤스키에게 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었다.
‘마치 건과가 비실체인 겉껍질을 부수고 나오는 것 같이 나도 이들을 깨버리고 나가야만 해.’
어슐라는 차츰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자기의 성장에 눈을 돌렸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그녀의 욕정으로 인해 그녀와 일체가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슐라가 그를 그러한 존재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는 이제 빤히 다 드러난 존재였다. 어슐라는 지나간 것에 대해 애틋한 정을 느끼듯, 그에 대해 가슴 찐한 애정을 느꼈지만, 이제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를 흐르는 공허한 암흑의 공간을 겨우 건넌 그녀 앞에는 미지의 세계, 미탐험의 세계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다행히 아기는 가고 없었다. 그러나 아기가 존재했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었다. 스크레벤스키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그에게서 ‘결혼했음’이란 전보가 왔다. 어슐라는 그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며, 잘된 일이라고 환호했다.
그러는 동안 창 밖 하늘,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무지개가 막 생겨나고 있었다. 어슐라의 가슴이 저리도록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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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로렌스가 주인공으로 삼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아가 강한 여성들이다. 여성적인 여성, 순종적인 여성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이러한 그의 특성은 특히 그의 처녀작인 <아들과 연인>에서 잘 드러나 있다. <아들과 연인>의 주인공인 폴은 성년이 되자 미리암과 사귀기 시작하지만, 지나치게 희생적이며 자기 뜻을 주장하지 않는 그녀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나중에 자유롭고 주체적인 성향을 가진 클라라와 사랑에 빠진다. 처음으로 미리암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순간,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폴은 아무런 감정 없이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그녀에게 커다란 실망을 하고 만다.
이처럼 로렌스는 자아가 없이 순전히 남자에게 순종만 하는 전통적인 여성에게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로렌스의 여성관에는 아버지를 능가했던, 강인하고 지적이었던 자신의 엄마나 열정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프리다의 영향이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기의 독자적인 생각도, 취향도, 개성도 없이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여성이 매혹적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의 미덕을 남편의 생각과 취향에 그대로 따르는 순종과 겸양에서 찾았던, 과거 역사를 기억해 보면 당시 로렌스의 생각이 얼마나 진취적인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로렌스는 자신의 평론 <왕관>에서 바람직한 남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치 별과 별이 균형을 이루어 조화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순수하고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를 유지하는 별들의 평형상태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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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라와 스크레벤스키의 사랑은 영혼에 아무런 접촉이 없는 피상적인 육체의 사랑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결국 어슐라가 그와의 관계를 깨뜨린 것은 그의 영혼이 자유롭고 독자적인 주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영혼을 잃고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스크라벤스키는 자기의 자아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강력한 남성을 원하는 어슐라의 이상형이 결코 아니다. 말 떼들의 공격을 가까스로 물리친 뒤, 자기의 자아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획득한 어슐라는 자기의 결혼을 적당하고 안일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이제 어슐라는 용기를 내 자기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와의 만남인 진정한 사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다시 움켜잡는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조부모인 리디아와 톰의 관계처럼 서로 소통하지 못한 채 서로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느슨한 결합도, 부모인 애나와 윌의 관계처럼 강력한 자아에 의한 일방적 결합도 아닌, 무지개 빛 궁극의 사랑이라 할 것이다. 즉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뤄 창조적 인 삶의 바탕이 되는 이상적 사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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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없는 인간은 텅 빈 인간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 텅 빈 인간이라기보다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생각도, 취향도, 개성도 없이 사회가 일방적으로 주입하거나 남편이 명령하달 식으로 제공한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내면화시킨 인간이다. 애석하게도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독자적인 주체성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최고의 미덕이었다.
사랑은 독자적인 두 자아의 육체와 영혼이 끊임없이 상호 교류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두 자아는 영과 육을 소통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도 겪고 공감대도 넓혀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쪽 자아의 긍정적인 어떤 일면이 상대방의 자아의 핵에 닿아,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 자아를 변화시키는, 일종의 기적이다. 끊임없는 상호 소통의 이런 과정을 통해 각자의 자아의 경계는 넓어지고, 각자의 자아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두 자아의 공통분모는 깊고 커져만 간다.
이런 과정에서 겪게 되는, 화해와 공감이야말로 지상의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천상의 행복이 아닐까?
이러한 궁극의 사랑이라면, 어슐라처럼 한번 욕심내 볼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