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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시대를 앞서간 여성

   -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대하여

  톨스토이가 그린 인물들은 대부분 귀족들이다. 아마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귀족 사회 속 인물들을 그리기가 가장 수월하고 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성공한 부르조아 자식으로 거의 귀족과 같은 삶을 영위한 프루스트나 몰락한 귀족 출신인 발자크는 부유하고 혈통이 뛰어난 명문 귀족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다. 귀족들만이 부와 명예, 문화와 예술을 모두 다 누리고 살았던 사회였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발자크는 자기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돈 많은 귀부인의 도움을 받아 상류계층에 진입하고자 진력을 다했고, 가난하고 쇠락한 귀족의 후예인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자기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부의 쟁취에 평생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  

  그렇다면 18, 19세기 당시 밑바닥 서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삶의 비참함은 굳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리지 않아도 전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자, 그러면 이번엔 당시 일반 서민 계층의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을까를 한번 떠올려 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회 제도라 할 수 있는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들의 삶은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지배를 받아왔다. 따라서 당시 사회 체제의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삶은 그들을 짓누르는 신분 및 계층의 무게와 가부장제적인 남성들의 무게를 모두 다 짊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녀들은 부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성적 차별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멍에까지 오롯이 다 감당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대표적 작품이 바로 토마스 하디의 <테스>다. 하디는 이 작품에서 온갖 종류의 육체노동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귀족 남자의 노리개로 이용당하고 폐기처분 되는, 하층 여성의 고단한 삶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하층 출신의 여성이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주어진 자기의 운명을 극복할 가능성, 예컨대 상류층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지 않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그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지나갈 만큼이나 적지 않을까, 한다.

  놀랍게도 존 파울즈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거의 불가능한, 귀족 남성에 대한 하층 여인의 사랑의 쟁취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주인공 쎄러는 잘 생긴 귀족이자 아마추어 과학자이며 뛰어난 감수성과 시대를 앞서가는 의식을 지닌, 흠잡을 데 없는 찰스의 사랑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


  1867년 영국 남서부 라임 만, 원시림에 덮혀 있는 코브 해안 암벽을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찰스가 약혼녀 어니스티나와 함께 내려와 부두를 걷다가 우연히 방파제 위에서 바람에 옷자락이 날린 채 꿈쩍도 않고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쎄러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사회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엽 영국 사회는 빅토리아조 시대로 경제적으로는 부르조아지가, 정치나 문화 분야에서는 귀족 계급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격한 청교도적 규범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당시 사회구성원들은 순결․질서․절제․검약․순종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리에 의해, 다시 말해 지나치게 완고하고 편협하며 격식에 치우쳐 있는 기독교적 윤리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찰스는 준남작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유산 받은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평생 독신으로 산 백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는 상태다.  동시대인들과 달리 당시 사회의 편협한 사고방식에 매우 비판적이고 새로운 이론인 진화론을 신봉하고 있는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답답한 영국을 떠나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왔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그는 성게 화석과 같은 고생물학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다.

  한편 찰스의 약혼녀인 어니스티나는 포목상으로 대단한 부를 이룬, 신흥 부르조아 아버지의 지나친 염려와 보살핌으로 버릇없는 어린애처럼 자기만의 고집을 갖고 있는, 예쁘고 매력적인 아가씨이다. 양장점이나 양품점, 가구점에서 엄청난 돈을 쓰는 것 외에 특별한 다른 재능이 없는 그녀는 반듯한 이목구비에 다소 헝클어진 머리카락, 혈통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그리스인 같은 콧날과 차가운 잿빛 눈동자를 가진 찰스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완전히 찰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고민 중이다.    

  소설의 여주인공인 쎄러는 가난한 소작인의 딸로 태어나 기대 이상의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죽자 인근 지역에 가정교사로 일하던 중 프랑스 중위로 알려진 남자를 만나 사귀지만 그가 떠나버려 충격을 받은 상태다. 일자리가 끊긴 쎄러는 현재 돈 많은 풀트니 부인의 하인 겸 비서로 고용돼 있는데, 독선적이고 가학증적인 풀트니 부인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 즉 프랑스 중위 놈과 놀아난 년인 쎄러를 마음껏 지배하고 싶어 하지만, 사람들의 겉모습 아래 숨겨져 있는 본연의 모습을 간파하고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쎄러로 인해 녹록치 않은 상태다. 

  학창 시절,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수많은 소설과 시를 자기 고독의 안식처로  삼아온 그녀는 주위의 젊은이와도, 그렇다고 자기와 다른 상류층과도 어울리기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러기에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건강 때문에 올해도 이모인 트랙터 부인 댁을 방문한 어니스티나. 간밤에 잠을 충분히 이루지 못해 머리가 아픈 그녀를 남겨두고 혼자 코브 성벽을 돌아다니던 찰스는 풀트니 부인으로부터 겨우 휴가 시간을 얻어내 나온, ‘프랑스 중위의 여자’인 쎄러가 양지바른 풀밭에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순간, 그는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는데, 타락한 여자라는 추문에 시달리는 그녀가 사실은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배척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잠시 후, 숲속 오두막에 들렀다가 올라간 오솔길에서 다시 쎄러를 만나는 찰스. 어색함에 인사를 건네자 여기에서 자기를 보았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 달라 (풀트니 부인이 이곳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라며 출입을 금했기 때문에)고 말하고 자리를 뜬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고통을 느낄 것 같은, 그녀의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눈동자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다음 날 약혼녀와 함께 풀트니 부인 댁을 방문한 찰스는 독실한 신자인 풀트니 부인의 겉과 속이 다른, 잔인하고 가학적인 성격을 알아챈다. 며칠 후 다시 절벽을 오르는 찰스. 편마암층을 훑고 다니다가 다시 쎄러를 만난다. 그녀에게 길을 비켜주자 서둘러 그를 지나쳐 걷던 그녀가 그만 둔덕에 걸려 넘어진다.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도우는 찰스.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다 발목이라도 삐면 어떻게 하겠냐 (인적이 드문 곳이라)며 걱정하는 찰스를 직선적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서 찰스는 지성과 꼿꼿한 정신, 동정에 대한 조용한 거부, 억제된 감각 등을 발견한다. 이어 얼굴을 온통 뒤덮은 듯한 그녀의 검은 눈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 눈빛에 마음이 흔들리는데. 나란히 함께 걸으며 가볍게 신상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풀트니 부인의 성격을 잘 아는 찰스는 쎄러에게 이 고장을 떠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한다. 하지만 바다 쪽으로 돌아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이곳을 떠날 수 없노라고, 이곳만이 자기의 구원이라고 말하는 쎄러. 찰스는 그녀가 프랑스 남자를 기다리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쎄러는 그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당황해 하는 찰스. 

  찰스는 집에 돌아와 시골을 경멸하는 어니스티나와 연주회에 다녀온 뒤, 자기도 모르게 깊은 성찰에 빠져든다. 얌전하고 냉담한 어니스티나의 개성 없는 얼굴 뒤에서 지겨운 이기심만을 발견하게 된 찰스는 인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순간에 자기가 너무 인습적이고 안일한 선택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회의한다. 저절로 쎄러의 풍부한 얼굴 표정이 떠오르자 찰스는 그녀에게 일순간 반한 건 사실이지만, 그를 매혹하는 것은 쎄러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감정, 즉 그녀가 상징하는 어떤 가능성임을 깨닫는다. 결국 찰스는 언제나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였던 자기의 미래가 이미 그 길을 훤히 알고 있는 손쉬운 항로로 바뀌어 버린 게 아닌가, 탄식한다. 

  편두통을 앓고 있는 어니스티나. 할 일이 없어진 찰스는 이번엔 쎄러를 피해 이전과 다른 길을 가는데, 화석을 찾아 기슭을 오르던 중 쎄러를 만난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조심스레 두 개의 훌륭한 별조개 화석을 내미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지나치려는 찰스에게 쎄러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자기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독실한 기독인들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이라며,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당황해 하며 침묵하는 찰스. 찰스가 그만 돌아서서 가려고 하자 쎄러가 무릎을 꿇고 꼭 한 번만 더 자기를 만나 달라며 부탁한다. 머뭇거리는 찰스.

  마을 의사에게서 쎄러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우울증 환자라는 얘기를 듣는 찰스. 하지만 결국 코브 절벽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쎄러는 자기가 지성과 아름다움과 배움을 추구할 권리가 없는 여자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와 대등한 사람을 만날 수도, 그렇다고 다른 세계를 원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에게 토로한다. 이어 결혼을 약속하고 자기를 떠난 프랑스 중위를 찾아 항구로 갔지만 그는 이미 변해 있었다고, 그래서 일부러 그에게 스스로 자기 몸을 바쳤다고 고백한다. 쎄러는 그 이유를 자기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즉 다른 여자들이 꿈꾸는 순결한 행복을 포기하고, 모든 이들로부터 스스로 추방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찰스. 지금까지 여자와 그처럼 친밀하게 생각과 감정을 나눈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백부로부터 빨리 자기에게로 오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백부에게 가는 찰스. 육십이 넘도록 독신으로 있던 백부가 갑자기 결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너무 놀란다. 이제 백부로부터 거대한 유산 상속을 받을 수 없게 된, 찰스는 라임으로 돌아와 어니스티나에게 소식을 전하는데.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분노를 드러내는 어니스티나에게 실망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찰스는 그녀의 이모로부터 쎄러가 해고됐고, 지금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급히 만난 의사로부터 쎄러가 자살할 가능성이 있으니 내일 아침에 수색을 펼칠 예정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 이른 새벽 그녀를 찾아나서는 찰스. 이전에 만났던 오두막, 어둠 속 칸막이 너머에 잠들어 있는 쎄러를 발견한다. 쎄러에게 라임을 떠나야한다고 말하는데 순간 그녀의 몸 전체에서 불꽃이 인다.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더니 거기에 입술을 갖다 대는 쎄러. 자기도 모르게 찰스는 쎄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그녀의 입술을 찾는다. 곧이어 그녀를 밀어내며 자기가 타락한 범죄자라도 된 듯 당황하는 찰스. 그녀에게 엑서터로 가라며 돈이 든 자기 지갑을 건네주자 다시는 선생님을 뵙지 못 하겠군요, 하고 말하는 쎄러. 아니라고는 말 못한다고 답하자, 쎄러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라며 말을 맺지 못한다. 당신을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하고 발길을 돌리는 찰스.  

  이제 미래의 장인을 만나 백부의 결혼으로 인해 자기의 상황이 변했음을 알리는 찰스. 나중에 자기의 사업을 이어받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자기가 장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돈에 팔린 남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던 적이 없었던 찰스. 장사꾼이라는 직업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인을 통해 주소만 적힌, 쎄러가 보낸 편지를 받아든 찰스. 결국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작은 호텔을 찾아간다. 일층 거실에서 만나 몇 가지만 물어보고 가려고 하는데, 호텔 여주인 노파로부터 그녀가 발목을 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층계를 올라가 쎄러를 만나는 찰스. 다리를 담요로 덮은 채 무력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쎄러를 본다. 그를 보자 몹시 당황해하며 쎄러가 기어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자 그 순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소유하고 그녀 속으로 녹아들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끼는 찰스. 선생님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는 그녀의 말에 그만 무너지고 만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침묵이 흐른 후, 파혼을 하겠다고 말하는 찰스에게 쎄러는 자기가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었다고 실토한다. 하지만 당신이 자기랑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고, 이제 당신이 한때나마 자기를 사랑한 날이 정말로 있었다는 걸 알게 됐기에, 모든 걸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와이셔츠 앞자락에 붉은 얼룩이 묻어 있는 걸 본 찰스는 쎄러가 프랑스 중위에게 자기 몸을 허락했다는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쎄러가 자기를 손아귀에 넣게 위해 사기극을 벌인 것임을 깨닫는 찰스에게,


  “당신은 저에게 위안을 주셨어요. 다른 세상, 다른 시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면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위안을. 그리고 당신은 저에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어요. … 지금까지 당신을 계속 속여 왔지만, 단 한 가지 당신을 속이지 않은 게 있어요. 전 당신을 사랑했어요. … 당신을 속인 건 제 외로움이었어요.”

  

  이어 쎄러는 자기와 함께 있으면 당신한테는 어떤 행복도 있을 수 없고, 자기랑 결혼할 수 없다며 이제 그만 떠나달라고 말한다. 


  라임에 돌아와 어니스티나를 만나 자기의 파혼 결심을 알리는 찰스. 기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는 어니스티나. 바로 의사를 부르고 난 찰스는 이번에 저지른 죄(약속을 파기한 죄)를 속죄하는 일이, 즉 이번 행동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앞으로의 자기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급히 다시 쎄러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아왔지만 찰스는 주인 노파으로부터 그녀가 아무 소식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를 찾아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녀도 허탕을 치는 찰스. 결국 탐정까지 고용해 보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어니스티나 아버지가 제기한 명예 훼손죄 소송에 휘말려 고초를 겪는다.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찰스. 열다섯 달에 걸쳐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를 돌아다니는데. 지금 자기의 운명이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자기가 거부했던 운명(그러니까 어니스티나와의 현실타협적인 결혼)보다는 고귀하다고 느낀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신대륙 미국행의 배에 오르는 찰스. 보스턴에서 미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솔직하고 도전적인 태도를 보며 쎄러를 떠올린다. 몇 달 간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찰스는 자유에 대한 자기의 신념을 재확인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변호사로부터 쎄러를 찾았다는 전보를 받는다.  


                                                                            *  


  영화의 고전이 193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이듯 소설의 고전은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이 책에서 다룬 소설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리얼리즘 소설은 작가가 전지전능한 신과도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조종, 결정한다. 하지만 리얼리즘적 문학 표현방식은 20세기에 들어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적 표현방식에 의해 도전을 받아왔다. 리얼리즘 소설은 그것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들처럼 받아들여지게끔 하는데, 이와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작품이 작가가 써낸 주관적 창작물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20세기 중엽의 작가인 존 파울즈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19세기 영국을 지배했던 빅토리아조 시대의 정신 풍토와 문화, 풍속 등을 다각적으로 고증하여 더 없이 세밀하게, 즉 리얼리즘적으로 표현해냈다. (물론 편의상 이 글에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파울즈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에 이 작품에서 포스트모던적 표현방식을 첨가했다. 즉  파울즈는 의도적으로 작가를 소설 속 인물로 등장시켜 등장인물들을 관찰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등장인물 각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작가가 자기 의도대로 그들의 운명을 주무르지 않게끔 이야기를 전개시키려 한다. 다시 말해 파울즈는 이 작품에서 리얼리즘적 요소인 사실성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인 상상력과 같이 소설 특유의 허구적인 측면을 혼합시켜냈다. 

  이러한 파울즈의 입장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찰스가 쎄러를 만나는 장면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 둘을 우리 독자에게 각각 선사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결말은 리얼리즘 소설 속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쎄러가 살고 있는 집을 찾은 찰스는 등나무 덩굴이 늘어진 벽돌집의 벨을 누른다. 한 아가씨의 인도를 받아 그림들이 빽빽이 걸려 있는 층계를 올라 잠시 대기하고 있는 찰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쎄러가 예전처럼 칙칙한 의상이 아니라 신여성의 자유분방한 복장을 입고 훤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크게 놀란다. 자기가 파혼을 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다녔다는 말을 하는 찰스에게 당황해 하며 그동안 자기에게는 인생이 퍽 너그러웠다고 말하는 쎄러. 찰스가 아까 저택에 들어오면서 본 남자 화가에 대해 의심을 하자, 쎄러는 자기는 그분의 정부가 아니라 조수라고 답한다. 

  수많은 말들이 오가고. 쎄러는 하지만 자기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그 화가와 당신의 공통된 경쟁자는 바로 이미 고독에 길들여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도 남편이라면 결혼 생활에서 자기에게 아내로서 적당한 역할을 하길 원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반문하면서 자기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쎄러의 말에 격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는 찰스. 그러니까 그녀는 여전히 어느 누구와도 다른, 자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망과 좌절, 분노가 찰스의 심장을 헤집어 놓고, 이제 그만 가려고 하는 찰스의 앞을 가로막고 얼굴을 붉히며 당신이 만나야 할 숙녀가 있다며 자리를 뜨는 쎄러. 잠시 뒤, 찰스는 아까 현관문을 열어주었던 아가씨가 한 여자아이를 안고 오는 걸 본다. 의아해 하는 찰스. 이어 쎄러가 들어오고 찰스는 그 여자아이가 자기의 아이임을 알게 된다. 찰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찰스는 그녀의 시선에서 이 세계가 한꺼번에 녹아버리면서 과거는 이제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는다. 

  

  파울즈는 이 같은 해피엔딩의 첫 번째 결말에 이어 두 번째 결말을 내놓는다. 이제 작가는 소설 속 등장한 인물로 변신해 찰스가 혼자 외롭게 남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쎄러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그러니까 아내로서의 삶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알린다. 따라서 이제 찰스에게도 쎄러처럼 정신의 완전무결한 상태를 본래대로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정신적 독신 생활을 하는 길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      


  이 작품을 읽고 난, 독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반응으로 날카롭게 나뉜다. 하나는 찰스라고 하는 훌륭한 귀족 청년의 행복한 미래가 쎄러라고 하는 비천한 출신의 팜므 파탈에 의해 파탄이 났다고 애석해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록 평민 출신이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지적이고 열정적인 쎄러가 당시 최고의 남자인 찰스의 사랑을 쟁취한 과정을 아주 흥미롭게 보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감상했다.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이 뛰어난 쎄러는 결국 자기만의 매력과 지략으로 자기와 신분이 다른 찰스의 사랑을 성공적으로 쟁취해낸다. 

  처음에 쎄러는 교활하다고 할 정도로 머리를 써 찰스로부터 자기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즉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는 여성이라는 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찰스 속에 잠자고 있는 기사도 정신을 불러낸다. 또한 실제로는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중위와의 경험을 거짓 조작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해 자기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찰스의 뇌리에 그러한 이미지를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또 쎄러는 풀트니 부인이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린 코브 절벽에 간 자기의 모습을 염탐하러 온, 다른 하인의 눈에 의도적으로 띄게 만듦으로써 풀트니 부인이 자기를 해고하게끔 유도하고, 이를 통해 찰스와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공고하게 만든다. 심지어 쎄러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 찾아온 찰스에게 자기가 사고로 부상당해 있다고 거짓 꾸밈으로써 그를 자기 곁에 더 오래 머물게끔 유도한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시피 지성도 아름다움도 배움도 추구할 권리가 완전히 배제된 채, 자기에게 걸맞은 남자와 결혼할 수도 없는 그녀가 과연 무엇을 시도하거나 선택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하면 그녀의 지나치게 영리한 계략을 단순하게 비난할 수 없지 않나 싶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는 오로지 자기의 지력 하나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낸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은 자기의 열망을 성공적으로 충족시켜 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일까, 하는 것은 19세기 빅토리아조 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그것도 하층 여성의 지위를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더욱이 어렵사리 찾아낸 찰스 앞에 나타난 쎄러는 찰스의 아이를 내미는 비참한 여인이 아니라, 자기 일을 갖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 당당한 여인이다. 심지어 처음엔 아이를 보여주지 않고 전통적인 아내로서의 의무보다는 자기의 실존적 자유를 먼저 내세운 다음 아이를 보여주는 해프닝까지 벌인다. 보통의 지력이나 약한 의지력으로는 어림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    


  존 파울즈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가 자라난, 영국 런던에서 약간 떨어진 작은 해안 도시 리언지의 문화가 답답하고 지나치게 인습적이어서 줄곧 거기에서 달아나려고 애썼다고 한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 주인공 찰스 역시 기존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고, 잦은 해외여행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려하는 진취적인 젊은이다. 

  찰스가 어니스티나와 파혼을 한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쎄러가 계기를 제공해주긴 했지만, 자기 미래를 안일하고 뻔한 방식이 아니라, 매순간 모든 가능성 앞에 열고 모험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려는, 그의 실존적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 빅토리아조 시대의 이상적 여성상은 가정의 천사, 혹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연약한 여성으로,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당연히 상하, 내지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갖는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갖고 있기 않기에 남성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야 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어니스티나와 달리 쎄러는 타인의 가치를 한눈에 간파할 수 있는 능력, 말하자면 타인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풀트니 부인과 같은 이들의 비열함과 거짓된 겸손과 어리석은 소행들을 한 눈에 꿰뚫는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그녀가 천성적으로 매우 희귀한 능력, 즉 지성과 감성의 조화를 갖고 있다고 덧붙인다. 즉 남성에게만 배타적으로 인정받았던 지성과 여성에게만 배타적으로 인정받았던 감성을 모두 구비한, 당시로는 매우 드문 여성이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쎄러를 만난 찰스는 놀랍게도 그녀가 자기와 지적으로 대등하다고 느낀다. 19세기 중엽 영국 사회에서 신분이 높고 가장 지적인, 그것도 남성이 신분이 비천한 여성에게서 이렇게 느끼는 경우는 아주 희박하다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전의 모습과 달리 당당하고 행복해 보이는 쎄러를 본 찰스는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알아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자기가 그녀에게 사정하는 입장이고, 그녀는 마지못해 들어주는 입장이 된 것이었다. 심지어 찰스는 그녀가 자기 성미와 취미에 맞는 다양한 일을 즐기고 있는, 현재의 생활을 다른 생활과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자기의 자유를 주장할 때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기까지 한다.           


                                                                             *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각자 자기의 자유를 버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는 두 번째 결말은 말할 것도 없고, 쎄러가 찰스에게 처음엔 아내의 역할을 거부하다가 나중에 아이를 보여주면서 해피엔딩의 급반전으로 끝나는 첫 번째 결말에서 우리는 쎄러가 결혼한 다음에도 자기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해달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사실 비록 허구적 인물이라 할지라도 빅토리아조 시대에 그토록 독립적이고 그토록 지적인 여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이런 새로운 시대의 여성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파울즈의 실력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각하기 시작한 헬레니즘 시대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 능력을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파악해 왔다. 따라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거니와 토마스 아퀴나스나 데카르트 같은 중세, 근대의 철학자들 역시 이성 능력이 부족한 여성을 자격 미달의 인간, 즉 불완전한 인간으로 파악해 왔다. 

  바로 이러한 맥락 위에서 보편적인 실천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인간 윤리의 근본법칙으로 파악한,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선천적으로 실천이성 능력이 뒤떨어진 여성이 추구해야 할 윤리를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 즉 정절과 순종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이 이성 능력을, 여성이 감성 능력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오랜 기간 동안 남성이 사회라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회적인 노동을, 여성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사적 노동을 주로 담당해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육아와 가사라는, 여성이 담당해 온 사적 노동은 주로 가족 구성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서비스업으로 일종의 감성 노동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주로 남성이 담당해 온 사회적 노동은 대자연이나 사회 전체, 또는 다른 사회구성원 등을 대상으로 하기에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필요로 하고, 또 발휘해야 하는 노동이다. 이처럼 여성과 남성이 담당했던 서로 다른 노동의 성질은 여성과 남성에게 서로 다른 인성의 발달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오른 팔로 테니스를 오랫동안 쳐온 선수의 오른 팔이 왼 팔보다 길이가 길듯이.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은 더 이상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 문명의 발달로 가사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여성들은 자기 능력에 맞게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해 왔고, 이에 상응하여 남성들도 사적 노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 하에서는 여성에게도 남성 못지않은 지적 능력이, 남성에게도 여성 못지않은 감성 능력이 이전보다 더 많이 요구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보다 더 총체적인 인간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공통분모를 깊고 넓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영과 육의 소통을 통해 각자의 존재의 핵심에 가 닿고, 그럼으로써 서로의 존재에 변화를 끼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감정 공유지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여성과 남성처럼 존재의 지평의 높낮이가 현격하게 다르거나 처음부터 서로의 삶과 인격 내용이 모두 너무 작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면 서로가 함께 누리는 행복과 성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찰스가 시대를 앞서가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쎄러를 선택한 행위는 시대의 한계를 뚫고, 두 총체적 인격의 보다 높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값비싼 노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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