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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숙 Oct 21. 2022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탐구

   -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이번 학기 성적 작성도 다 끝났다. 이제 며칠 지나면 교수로서의 생활도 끝이 난다. 

  강의는 거의 40년 동안 해 왔지만, 몇 년 전부터 첫 시간에 빼놓지 않고 해 온 강의가 있다.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주제의 강의다. 그래도 명색이 철학을 전공한 교수로서, 또 인생 선배로서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였다. 

  강의의 핵심은 ‘나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을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행복과 일치시킬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찾으라는 내용이다. 많이 듣게 되는 내용이긴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와 나만의 접촉점’을 확실하게 다지는 하는 일이다. 

  인간은 호랑이와 다르게 무리 동물에 가깝다.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삶이 다른 인간들과의 협업 속에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깊은 안정감과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다. 또한 고등동물인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포만감만으로는 충분히 행복하기 어렵다. 자기의 정체성, 혹은 존재의 이유를 느낄 수 없으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결핍감을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바로 사회 속에서이다. 그래서 ‘나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을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행복과 일치시킬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찾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이번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일생동안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일을 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솔직히 대체로 일, 또는 노동의 과정이라는 게 그닥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죽하면 하루라도 빨리 파이어하는 게 요즘 젊은이들의 소망이 되었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장자가 인생의 최고의 경지로 말한, ‘일하는 게 노는 것이요, 노는 게 일하는 것’인 경지를 떠올리면, 그때는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과거의 인간에게 있어서 일은 대체로 고된 육체적 노동을 의미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은 기계나 로봇과 같은 과학 기술의 혜택을 점점 더 받을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노동은 점점 더 전염병을 피하듯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나의 자아 실현의 중요한 장이 되어 갈 가능성이 커져갈 것이다. 장자가 말한, ‘일하는 게 노는 것이요, 노는 게 일하는 것’인 경지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노동이 힘겹기 보다는, 하기 쉽고 또 하고 싶은 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이란 처음부터 쉬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이유는 어떤 일이나 그 일이 요구하는 특정한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려면 아는 내용을 말로 잘 전달할 줄 아는 기술이, 피아노로 연주를 하려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내가 학생들에게 권하는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해 그 일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숙달함으로써, 그 일이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기술도 단기간에 숙달될 수는 없다. 따라서 하루에 3시간씩 시간을 정해, 그 일에 필수적인 기술을 연마하는 걸 일정한 루틴으로, 즉 습관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젊은 시절이 이렇게 자기만의 기술을 닦아놓으면 이후에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기 정체성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부터 퇴직 이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오전 시간 두 세 시간을 그 일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닦는데 써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 과정의 일환으로 내가 하게 된 작업이었다. 정말 한 십 년간 꾸준히 노력하면 일하는 게 노는 것이요, 노는 게 일하는 것인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


  지난 겨울, 한 미술 컬럼니스트가 쓴 미술 관련 에세이를 재미있게 보다가 불쑥 내가 좋아하는 고전 작품에 대한 에세이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결단을 내리자마자 바로 이 작업에 매진해 오고 있는 나에게 한 친구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하려는 얘기가 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의 주제라 할만한, 톨스토이의 중심 사상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었다. 톨스토이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고귀한 정신성을 가진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귀족으로 태어난 데다 엄청난 명성까지 얻은 대문호임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팽팽한 정신적 긴장의 삶을 잠시도 늦추지 않고 살았던,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는 39세에 <전쟁과 평화>(1867년), 49세에 <안나 카레니나>(1877년)를 완성해 대성공을 거두고, 이미 꽤 유복하고 다복한 가정을 이룬 가장이었지만,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헨리 조지의 <토지 국유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사유재산을 부정함으로써 급기야 아내와 격렬한 의견 대립을 보게 된 톨스토이는 귀족으로서의 사생활과 자기가 추구하는 생활방식의 갈등으로 인해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방황을 겪었다.   

  이처럼 1870년 대 후반,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 최고의 시점에서 오히려 최대의 정신적 위기를 경험하게 된 톨스토이는 이 위기를 무엇보다 순박한 민중과의 접촉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지속적으로 빈민 구제와 농민 구제를 위해 힘썼지만,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1910년 81세의 나이에,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놓고 이전부터 수차 감행했던 가출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안드레이와 삐에르가 톨스토이 본인을 닮은 두 인물이라는 말은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안드레이는 현실적 합리주의자이고, 삐에르는 꿈을 쫓는 공상가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신세계는 매우 커다란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진정한 친구로 깊이 신뢰하게 된다. 두 사람 다 자기의 허영과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속물들의 세상인 사교계에 등을 돌린 채, 사회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고 싶어 하고, 인생의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며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영혼이 닮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작품을 꼼꼼히 읽다 보면, 두 사람이 최후에 도달한 정신적 경지 역시 유사성과 더불어 차이점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명성을 쫓았던 안드레이 볼꼰스끼 공작이 커다란 정신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건 바로 그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예상할 만큼 심각한 부상을 당한 직후이다. 활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인내심이 강한 그는 선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중, 쁘라쯔 산 위에서 포탄에 맞아 깃대를 쥔 채 쓰러진다. 이때 그의 시야에 저 멀리 드높은, 영원한 하늘의 모습이 들어오는데, 마침 그때 적군을 둘러보러 나온, 나폴레옹의 모습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 순간, 그에게 나폴레옹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처럼 느껴진다. 이후 들것에 실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게 된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이란 영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허영심과 승리의 기쁨이 드넓고 공평하고 선량한 하늘이 상징하는 궁극적인 것에 비해 얼마나 무익하고 시시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강렬하게 느낀다. 

  이어 두 번째 사고에서 안드레이는 자기의 죽음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할 만큼, 훨씬 강도가 높은 부상을 입게 된다. 뱃속의 심한 고통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이 든 안드레이는 차츰 고통이 사라지면서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감에 젖어드는데, 그때 마침 비명을 지르는 부상병 아나똘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순간 머릿속에 이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안드레이는 전혀 예상치 않게도 이 사나이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러자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좁은 미망이 걷혀지면서 안드레이는 자기를 사랑해 준 사람들과 모든 동포들에 대한 사랑, 심지어 적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경험한다. 안드레이의 가슴 속에 사랑이라는 궁극적인 가치가 명예와 같은 현실적인 가치를 밀어내고 자리를 잡는, 귀중한 순간이라 하겠다.   

  이후, 안드레이는 들것에 실려 수송되는 중, 기적적으로 나따샤를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더욱 자기의 경험을 심화시켜나간다. 이제 안드레이는 예전처럼 자기를 기쁘게 한 그녀의 매력만을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영혼을 처음으로 떠올리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그녀를 거절했던 순간 자기가 그녀에게 행한 잔혹성을, 그리고 그때의 그녀의 기분, 그녀의 고통과 수치, 후회를 이해하게 된다. 이리하여 안드레이는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뚜렷이 깨닫는다. 만약에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애당초 이러한 이해가 발생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오직 사랑에 의해 맺어지고 있다. 사랑은 곧 신이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 사랑의 일부인 나에게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안드레이는 이러한 생각을 함으로써 충분한 위안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러한 생각이 한낱 머릿속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냉정한 결론에 도달한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무언가 일면적이고, 개인적이며, 이지적인 머리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 분명한 데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 불안과 애매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삐에르가 포로 생활이라는 험난한 경험을 통해 얻어낸 지혜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필자는 톨스토이가 안드레이가 도달했던 추상적 사유가 가진 한계라 할 수 있는, 그 결핍을 삐에르의 깨달음을 통해 보완해 주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방화범으로 몰려 수감된 삐에르는 자기 앞에서 한 명 한 명 처형을 당하자 패닉 상태에 빠지는데, 자기 차례가 됐는데 이유도 알 수 없이 처형이 면제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포로로 다시 수감된 삐에르는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처음엔 이 세계와 인간 존재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비관적인 시각에 빠져들지만, 새로 알게 된 쁠라똔이라는 인물에 의해 커다란 정신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삐에르의 눈에 쁠라똔은 겉으론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기가 진정으로 닮고 싶은, 러시아적인 선량하고 원만한 영혼의 화신이다. 

  잔주름이 많지만 젊고 순진한 표정,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 솔직하고 급소를 찌르는 말투, 거역할 수 없이 설득력 있는 표현의 정확성, 피로나 병을 모르는 것 같은 체력과 민첩성 등등 특별히 잘하지는 않지만, 못한 것이 별로 없는 그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었고, 밤에만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또 잘 때는 돌처럼, 일어날 때는 부푼 빵처럼 일어나는 그에게서 삐에르가 발견한,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그가 매우 균형 잡힌 긍정적 사유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기가 남의 숲을 도벌하러 간 바람에 감시인에게 매를 맞고 재판에 회부되어 군대로 보내졌는데, 오히려 이게 전화위복이 되어 집안 전체가 훨씬 더 잘살게 되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만약에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그 덕분에 자기가 포로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셋이나 되는 동생이 군대에 갔을 테고, 그랬다면 집안 상황이 더 나빠졌을 거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야가 자기 개인의 불행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의 연관성을 바라봄으로써 그는 긍정적이고 밝고 선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와 삶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던 삐에르는 이처럼 한 병사에 지나지 않은 그를 통해 다시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회복하게 된다. 이제 삐에르는 ‘소박, 선, 진실이 없는 곳에 위대함은 없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살아있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자각한다.  

  ‘삶이 전부인 것이다. 삶이 신인 것이다. 모든 것이 변동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그 운동이 신인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신을 자각하는 기쁨이 있다. 삶을 사랑해야 한다. 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 삶을 고뇌 속에서, 죄 없는 고뇌 속에서 사랑하는 일이 무엇보다 어렵고 무엇보다 행복한 일인 것이다.’         

  다시 집에 돌아온 삐에르는 그가 이전에 고민하고 끊임없이 찾고 있었던 것, 즉 인생의 목적이 지금의 그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고 느낀다. 그리고 바로 이 목적이 없다는 것에서 삐에르는 완전하고도 기쁜, 자유로운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이제 위대하고 무한한 것을 모든 것 안에서 보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들여다보았던 망원경을 버리고, 즉 추상적 사유를 버리고, 자기 주위에서 항상 변화하는 무한한 인생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톨스토이는 안드레이와 삐에르의 통찰을 통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나 인격 완성 (완전히 좋은 사람)이라는 목표라는 건 애초에 없는 것이며, 오로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변화(이것이 바로 삶이다)를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바라보면서 긍정적인 태도로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긍정적인 태도로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선 세상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꾸준히 관찰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관찰한 결과물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에서 사고하여, 그 판단의 결과에 따라 그때그때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정신적으로 부지런해야 하고, 또 육체적으로 민첩해야 한다.

      

                                                                             *


  ‘소박, 선량, 진실이 없는 곳에 위대함은 없다.’는 톨스토이의 말은 우리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오늘날 우리는 주위에서 매일, 아니 매순간 부를 향한 미친 듯한 질주를 목도한다. 물론 일정한 부가 없으면 심각한 부자유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당연한 일상 풍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인간적인 삶을 유지케 하는 부를 훨씬 능가하는, 남들보다 더 화려한 삶을 가능케 해주는, 커다란 부에 대한 맹목적 추구가 대다수의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SNS를 통해 매순간 날아오는, 우리 눈을 부시게 만드는, 연예인들의 사치 행각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서 그들을 닮고 싶어 하는, 브레이크 없는 욕망을 양산하고 있다. 

  현재 연예인들의 삶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살았던 당시에는 귀족들이 누렸던 사교계 생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안드레이도 삐에르도 다 사교계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자. 

  사교계에서는 진실보다는 외양이, 삶의 내용과 의미보다는 비본질적인 가십거리가 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남들보다 더 사치스럽게 꾸미려 한다. 한마디로 허영심이 지배하는 사교계에서는 누가 누가 더 잘났고 부유한가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세상에서는 진정한 유대나 우정, 혹은 사랑을 기대하기 매우 어렵고, 따라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도 그만큼 더 힘들다.

  이러한 사교계의 특성은 현재 연예인들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화려함이라는 외양 때문에 연예인들의 삶에 대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환상을 품고 있지만, 막상 연예인들의 내면이 얼마나 삭막하고 피폐한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적지 않은 연예인들이 겉으론 멀쩡해도 속으론 깊이 곪아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이 내면적으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알코올과 프로포폴에 의지하거나 잘못된 탈선과 타락, 극단적 선택 등을 해왔는지를 떠올려 보라.  

  돈은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삶을 위해 일정 정도 꼭 필요하지만, 너무 많은 돈은 우리의 내면을 충만한 행복보다는 오히려 극단적 이기주의의 황량한 공허감으로 이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위대한 작가가 사랑했던 러시아가 현재 전 세계의 지탄을 자초하는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어법을 빌자면 전쟁을 일으킨 푸틴 당신의 사적인 욕망이 무엇이든지 간에 (물론 자신은 대의를 위한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당신의 게임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톨스토이가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그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현재 러시아가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수세에 몰리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의 놀라운 활약은 미국의 빅테크 기술과 서방 무기의 도움이 컸지만,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자유를 향한 강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해당 군인들의 정신력, 즉 사기로 보고 있다. 실제로 현재 군인을 포함한 국민 모두의 똘똘 뭉친 정신력, 즉 사기로 이미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완패하고 있다.  

  톨스토이와 같이 위대한 예술가를 가진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인 현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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