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 래너 미터(글항아리) ●●●●●●●◐○○
그의 계산은 간단했다. 장제스가 패배할 수록 (옌안은) 이익이라는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5개월이 지난 1938년 10월의 어두웠던 시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변함없었다. 관찰자들(중국의 사업가, 영국 외교관, 일본 장군들)은 매번 새로운 재앙이 나타날 때마다 틀림없이 중국이 항전을 끝내고 신속하게 항복하거나, 적어도 중국 정부가 도쿄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일이 해결되리라 예견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난징에서, 우한에서 저항을 분쇄하는 일본군의 가공할 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침략자의 동원력과 기술력, 경제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싸우고 있었다.
- p. 204. 죽음의 강
. 우리의 바로 옆에서, 백년도 채 되지 않은 근접한 시기에 일어난 역사인데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에도 중일전쟁은 영 관심을 받지 못하는 전쟁이다. 심지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대부분은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묘하게 뒤틀려 있다. 그래서 그간 중일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계속 바뀌어 왔고, 평가가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역사 그 자체와, 우리가 알고 있는 '팩트' 그 자체가 무엇인지 -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대강 우리가 알고 있는 중일전쟁의 전개를 풀어보자면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빼앗은 일본이 그에 만족하지 않고 남진을 시도했으며, 중국은 별다른 저항없이 무기력하게 험준한 외곽의 산악지대로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난징대학살과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중국은 너무도 넓었기에 일본은 일부 점과 선만을 지배하는 게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미국의 지원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온전히 힘을 투사하지 못한 상태에서 원폭으로 인한 일본의 모든 전선 무조건 항복으로 중일전쟁은 끝이 난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역사와 관련해 공산당과 손을 잡은 독립군의 활약상이 부각되고, 임정의 OSS 부대 정도가 가십으로 소모된다.
1939년 9월, 모든 지휘권을 지나 파견군으로 통합한 일본군은 10만 명의 병력으로 중국 정부의 도시 창사 공략에 나섰다. 이 도시는 1938년 10월 우한 철수 후 장제스가 불태우라고 지시하면서 이미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만약 창사가 함락될 경우 중국 최대의 곡창지대 중 하나인 후난성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쓰촨성을 향하는 길목이 열리고 충칭으로 진격하여 장제스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광동 군벌 쉐웨는 도시를 훌륭하게 방어했다. 그는 유격전과 정규전을 병행했고 일본군을 매복한 곳까지 유인한 후 병참선을 차단했다. 창사는 여전히 중국인들이 차지했다.
- p. 255. 진주만으로 향하다
. 그런 상태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내용들이 부정된다. 중국은 - 특히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군의 주력을 쏟아부어가며 일본과 필사적으로 싸웠고, 난징이 함락된 이후에는 황하의 제방까지 폭파하고 유인과 역습을 반복해가며 일본과 계속되는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연합국의 참모였던 스틸웰은 중국군에게 주력을 빼서 버마의 연합군을 지원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고, 중국군은 버마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으며 곤경에 빠졌다. 그 결과 일본은 태평양에서 패색이 짙던 전쟁 막바지까지 중국을 강력하게 몰아붙였고, 비록 점과 선 위주의 공격이긴 했지만 그 하나하나가 전략과 보급의 핵심이 되는 아픈 지점이었다. 그리고 버마에서 주력 상당수를 소모한 중국은 일본의 대륙타통작전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며 중일전쟁은 끝이 난다.
. 이렇듯 이 책에서 래너 미터는 중일전쟁의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로 장제스를 꼽는다. 그는 강력한 일본군의 공세와 왕징후이를 비롯한 변절자, 스틸웰 등 동맹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며 중국을 지켜냈고, 중국이 항복했다면 태평양 어딘가로 향했을 일본군 수십만을 마지막까지 중국에 묶어두었다. 물론 장제스의 잘못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군벌들에 대한 의심으로 적재적소에 병력을 지원하지 못해 패배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는 작전이었지만 황하제방 폭파는 참혹한 허난성 대기근을 불러온다. 하지만 분명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중국의 영웅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였다. 스탈린조차도 마오쩌둥이 아닌 장제스와 손을 잡았을 만큼.
그들(옌안)은 일본군과 정면에서 만나는 것을 피하면서 적의 소부대를 가끔씩 공격하는 것으로 국한시키고 있다고 판단된다. 중국에서 지난 7년 동안의 전투를 검토한다면 공산당의 참전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에 불과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공산당은 규모와 격렬함에서 상하이와 쉬저우, 한커우(우한) 창사 전역에 비견될 만한 어떠한 전투도 치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주장과는 상반되지만, 그들은 단지 중국에서 활동하는 일본군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견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p. 415. 하나의 전쟁, 두 개의 전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에서의 국민당의 패배는 긴 시간 동안 중일전쟁사에서 국민당과 장제스의 활약을 지우고 그 대신 마오쩌둥과 연안의 공산당을 주역으로 내세웠다. 국민당의 저항을 폄하하는 대신 공산당의 후방 게릴라 활약을 강조했다. 이런 개찬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냐면, 아직 냉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의 한국에서는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만행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연합국의 지원으로 연명하다 어영부영 전쟁이 끝났다는 정도로 중일전쟁에 대해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냉전시대에 공산당이 잘했다고 할 수는 없었고, 국민당의 활약상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으므로. 그러다 냉전시기를 벗어나면서 중국공산당이 이야기하는대로 공산당의 활약상이 몇십년간 부각되었고, 또다시 요 몇년 새에 들어서야 국민당의 활약이 재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 이렇듯 고대사도 아니고, 채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집단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사실과 평가가 180도로 계속 바뀌는 것을 보면, 우리가 '팩트'라고 믿어왔던 역사가 실제로는 얼마나 불완전하고 취약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래너 미터의 이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 이야기를 읽는 것을 넘어, 역사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장제스의 서방 연합국들이 가장 즐겨했던 비난은 국민당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는데 소극적이었으며, 서방의 도움을 받아 이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 동일한 관찰자들은 경제적 생산성이 전혀 없는 수십만 명의 군인을 한데 모아두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부담인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국민당 중국은 옌안과 다른 의미에서 봉쇄당한 신세였다. 마오는 상대적으로 군비 부담이 낮아 국민당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재정 수입을 배분할 수 있었다.
- p. 343. 허난성의 대기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