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조직의 선택적 정의
얼마 전, 독감 확진자가 우리 조직 내에서 발생했다.
해당 직원은 격리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하면서도 복직 의사가 강했다.
본인도 일을 놓고 싶지 않아 했고 신규 사업 때문에 실제로 그 타이밍에 빠지면 업무 공백도 생길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다.
‘업무 연속성’과 ‘조직 전체의 건강 보호’.
결국 내린 결론은 ‘재택근무 전환’이었다.
격리 수준의 조치였지만 업무는 계속하자는 차선책이었다.
그리고 이 조치가 조직 내에 혼란을 주지 않도록 나는 전사 공지를 냈다.
사실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구성원들의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한 판단이었다.
며칠 뒤, 대표에게 “형평성” 문제로 심하게 질책을 받았다.
“왜 이 직원만 재택이냐”
“이건 예외적 특혜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왜 해당 팀 팀장과 협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렸냐”는 질책
불과 몇 달 전 같은 팀에서 장염에 걸린 직원이 있었다.
연차를 쓰라 했더니 그 팀장이 ‘일은 해야 한다’며 난감해했다.
그래서 나는 그 상황을 대표에게 직접 공유했다.
그랬더니 대표가 말했다.
“그럼 재택 시키자.”
그리고 대표는 덧붙였다.
“앞으로 팀장들이 원하면, 재택으로 전환하자.”
나는 이걸 ‘방침’이라고 받아들였다.
현장 상황에서 유연하게 판단하되 팀장의 요청과 조직 상황을 고려해 인사가 실행하는 방식.
그래서 이번에도 독감 걸린 직원을 재택으로 전환했고 그 내용과 취지를 전사 공지로 알린 것이다.
과거와 똑같은 방식, 똑같은 흐름이었다.
다른 점은 단 하나.
직원이 ‘직접’ 팀장에게 복귀 의사를 먼저 말했고 팀장은 “인사팀과 논의하라”라고 말했으며 그 후 나와 협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 직원의 말을 믿었고 기준에 따라 재택을 판단했고 대표에게 조치 후 보고 한 점은 이미 존재하는 전례와 기준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건
“왜 팀장에게 다시 보고가 안 됐느냐”
“왜 형평성 없는 특혜를 주느냐”
나는 혼났다. 아주 심하게.
같은 일이었고 같은 팀이었고 같은 방식이었고 같은 나였는데 이번에는 혼났다.
조직은 그때의 논리와 지금의 논리를 다르게 가져왔다.
형평성이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먼저였고 절차가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묻고 싶었던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늘 결정을 실행한 사람이 된다.
혼자 모든 과정을 설계하고 혼자 모든 책임을 졌던 사람.
그게 나였다.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조직이 언제나 공정한 원칙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같은 일도 누가 얘기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언제 벌어졌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누가 책임지기 싫어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뒤바뀐다.
형평성은 참 좋은 말이다.
정확히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면죄부고 어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 가장 그럴듯한 명분이 되어준다.
그날도 그랬다.
이전엔 아무 문제없었던 결정이 이번엔 갑자기 형평성 문제로 돌변했다.
내가 뭔가 기준을 어긴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혼나야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정의란, 단지 ‘옳은 것’이 아니다.
조직에서는 종종 ‘지금 당장 누가 책임질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가 바뀐다.
그 책임은 항상 의사결정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에게 몰린다.
내가 그 판단을 내렸고 내가 그 메일을 썼고 내가 그 상황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묻고 싶었다.
같은 결정을 같은 기준으로 내렸을 때 왜 한 번은 ‘좋은 유연함’이고 한 번은 ‘불공정한 특혜’가 되는 걸까.
조직은 말한다.
“우리는 원칙을 지킨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직은 원칙을 ‘선택’한다.
상황에 맞게, 감정에 맞게, 필요에 따라.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복귀 의지를 존중했고 다른 누군가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선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만 이 구조 속에서 최선은 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그래도 나는 또 판단할 것이다.
그 판단이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다면 또다시 책임을 질 준비도 할 것이다.
그게 일하는 사람의 자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