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망상
회사 생활에 불만이야 늘 있었고, 아침마다 분주히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괴롭게 느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만두지는 않았을 텐데. 게다가 이렇게 아내와 딸이 있는데 쉽게 관두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출근지를 떠올리니 어디로 의식을 집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좁은 사무실에 쓰러질 듯 위태로운 파티션을 얹어두고 독서실마냥 다닥다닥 붙어 앉아 여름엔 땀을, 겨울엔 콧물을 흘리며 이리저리 치이며 힘들게 보낸 회사가 분명히 존재했다. 거기에는 단발에 파마를 한 성격 좋은 남자 대리도 있었고 깔끔한 외모를 가졌지만 언제 어디에서 폭발할지 모르는 복잡한 성격의 부장도 있었다. 옆에서 늘 내 편을 들어줬던 하얀 얼굴에 노란 염색머리를 가진 여자 과장도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을 슬그머니 떠올리자 희미하게 그 이미지들이 사라진다.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문득 부장님이 나에게 화를 냈던 상황이 머리를 가볍게 스친다. ‘이럴 거면 이 사이트에서 철수해. 꼴도 보기 싫어. 당신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이게 뭐야!’며 움푹 들어간 눈을 시뻘겋게 부라리며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깊어졌던 부장님의 쌍꺼풀이 지금 내 눈알에 겹치면서 목구멍 밑에서 울화가 차오른다. 나의 모든 행동에 관심을 가졌던 부장 덕분에 다른 동료들에게서 멀어진 기억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어리고 순진했던 학창 시절 그랬던 것처럼 회사에서도 은근히 미움을 받으면서, 그곳을 그만 둘 생각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둬 버렸던가? 어두운 사무실과 애처로운 점심시간으로 기억되는 회사, 그래도 놓을 수 없었던 정상인으로서의 마지막 증거. 그걸 손에서 놔버렸다고?
아침 출근시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지하철 계단을 오른 기억이 떠오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조용히 오르다 보면 좌우로 공원이, 정면으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고층 아파트를 등지고 돌아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면 사차선 도로가 나타났고 그 도로변에 내가 근무하는 회사 건물이 있었다. 분명히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 씁쓸한 시간을 보낼 때 아내가 내 옆에 없었던가.
“얼마 전에도 당신이 얘기했지요. 너무 생생해서 진짜 같다고.
끊임없이 승객이 들이닥치는 지하철을 타며 통근하던 꿈을 꿨다더니……. 오늘도 그 꿈을 꿨나 보네요.”
꿈이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꿈인 것도 같다. 전 국민에게 따돌림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내가 사회생활을 했다니. 어울림을 두려워하는 내가 복잡한 대중교통에, 혼란스러운 인간관계가 필수인 직장생활 따위를 했을 리가 없다. 설령 그럴듯한 회사에 들어가 보통의 사람인척 연기를 했더라도 어둡고 축축한 내면이 금방 드러나 거절과 미움이 배어있는 그들의 언행을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문득 멍해졌다. 멍해진 상황만이 오로지 나인듯 하다. 음식 향기와 아이의 젓가락질, 아내의 걱정스런 눈빛조차 내 주의를 끌지못했다. 회사는 어떻게 되었고, 나는 언제부터 이곳에 앉아있었던가. 머리를 부여잡고 아내가 있는 현실로 돌아오려고 집중했다. 현실 감각을 깨우기 위해 생생한 나의 시간을 좀 더 떠올려보자. 좀 전엔 책장을 정리했고, 그 전에는 침실에서 서가로 걸어갔지. 그리고 그 전에는 침대에서 잠에서 깼고, 그 이전인 어제는….
‘…….’
꿈의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지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오늘 아침의 딸, 그리고 아내밖에 없다. 내 의지와는 달리 시선을, 의식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목이 부러져 한 곳만을 응시해야 하는 플라스틱 인형처럼.
“여보, 나 오늘 병원에 좀 가봐야겠어. 같이 가 줄래?”
“갑자기 병원에는 왜 가요?”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신경 정신과 같은 곳에 좀 가봐야겠어.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어. 혼자는 무서워. 같이 있어줄래?”
“물론 같이 있어야죠 여보. 하지만 병원에 가지 않아도 돼요. 집에서 우선 좀 쉬어 봐요. 그래도 계속 이상하면 그때 병원에 같이 가요. 당신 요즘 계속 피곤해 보여요.”
아우성을 치며 오가는 내 기억 혹은 허상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불안한 시선으로 아빠를 쳐다보는 딸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고 침실로 향했다. 부엌의 미닫이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침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에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내가 사는 집이 이층 집이었나? 의아함을 느끼는 머리와는 달리 내 몸은 자연스레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시선과 의식이 이미 내 것이 아닌 듯하다. ‘여기가 어디야’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는데 내 발은 늘 다녔던 곳처럼 위층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계단을 다 올라 몸을 180도 회전하자 아담한 가족실이 나왔다. 가족실을 지나 똑바로 열 세 걸음을 걸어가니 조금씩 열려있는 방문이 세 개 보였는데 그중 하나는 집에 있는 방문치고는 꽤 두꺼워보였다. 이번에는 내 손이 의심 없이 그 두꺼운 문을 밀어 열고 몸을 안으로 욱여넣었다.
침실이다.
높고 두꺼운 매트리스, 옷장이나 화장대 하나 없이 침대 하나가 방 하나를 차지한 아늑한 침실이다. 이곳에서는 잠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로지 완벽한 숙면을 위한 방이다. 방 오른쪽으로 가늘고 가로로 길게 난 창문은 어두운 블라인드로 언제든지 가릴 수 있게 되어있다.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완전한 휴식을 보낼 수 있는 장소. 익숙한 느낌인지 낯선 느낌인지 판단하기 힘든 이 침대에 나는 내 몸을 완전히 맡겼다. 몇 분 전의 불쾌한 경험을 털어내고 싶다. 집에서 2층에 올랐던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이 침실은 내 침실이 맞다. 내 기억 속에 익숙하게 자리잡은 침실. 익숙함에 뭍어있는 약간의 낯설음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내 뼈대와 근육은 그 떨림을 제어하기 위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이런 상황에서 이상하리만큼 침착하게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내 의지인지 육체의 의지인지 헷갈린다.
머리를 살짝 흔들고 관자놀이를 꾹 누른 다음 습관대로 두 팔을 뻗어 베개 밑으로 두 손을 마주 대었다. 그곳에서 부스럭 소리를 내는 따가운 종이 단면이 느껴졌다. 안전한 내 공간에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휴식을 보내려는 찰나, 신경을 깨워버린 그 쓰레기가 짜증스러웠다. 침대 밑으로 그냥 던져버릴까 고민했지만 30초 정도 늦게 자도 내 삶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생각에 한 번 펼쳐보기로 했다.
‘매트리스를 들어내고 쪽지를 찾을 것.
쪽지를 못 찾았다면 오늘 부디 잠들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