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망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현 Jan 09. 2023

5

짧은 소설, <망상>

내가 기억할 세 번째, 서재에서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책을 정리했다. 초라한 최문철에 관한 꿈을 꾸긴했지만 나는 괜찮다. 평행우주, 뭐 그런건가. 나는 그 최문철이 아니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이곳의 최문철이다. 정신을 바로잡고 다시 내 삶에 제대로 집중해야 한다. 나는 그 최문철이 아니다, 아닐거다. 나는 그에 관한 꿈을 꾼 것 뿐이다.


식당으로 향했다. 아내와 딸에게로 걸어갈수록, 내가 좀 더 집중하려고 할 수록 머릿속은 희미해지는 것 같다. 희미해지는 그걸 뚜렷하게 보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보이지 않는, 들으려고 할수록 더 들리지 않는 마치 이 세계가 다 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빠, 식사하세요.”

“우리 딸 수민아, 사랑해.”

“어머, 여보 오늘 참 다정하네요. 늘 그랬지만. 어서 식사해요. 수민이도 자리에 앉으렴.”

오늘은 회사에 출근한다는 둥의 얘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 얘기를 하지 않으면 쉬기 위해 침실로 다시 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럼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 밖으로 나가면 어떤 놀랄 일이 있으려나.


“여보, 오늘 하고 싶은 일 있어?”

“글쎄요. 그보다 당신 오늘은 괜찮아요?”

“뭐가?”

“아니…. 안색이 나빠 보여서 한 번 여쭤봤어요. 악몽이라도 꿨나 싶어서…. 괜찮다면 다행이고요.”

“오늘 컨디션 아주 좋아. 오랜만에 푹 잤나봐.”

“어제 잘 잤어요? 다행이네요. 그것 참, 정말 다행이네요 여보!”

“하하하. 내가 잘 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것보다 오늘은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데. 당신과 수민이랑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얘기만 들어도 신나지만, 여보. 오늘은 그냥 집에 있고 싶어요. 집에서 당신과 편하게 쉬고 싶어요.”

“나가서 커피도 한 잔하고 수민이 놀이 공원에도 가자고.”

“여보, 그냥 집에 있어요.”


순간 아내의 얼굴이 경직됐다. 아내의 하얀 피부가 유독 시퍼렇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수민이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수민이가 어디로 갔지?

“그건 그렇고, 수민이는 어딜 간거야.”

“여보, 괜찮아요? 오늘은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다니까. 좋아, 그럼 밖에 나가지 말자고. 그럼 집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영화라도 볼까?”

“영화요? 글쎄요. 저는 영화라는 걸 별로…….”

“그럼, 수민이와 같이 집에서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보드 게임 같은 거라고 할까? 얘는 밥 먹다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게임이요? 여보……. 그냥 우리 다 같이 쉬어요. 당신은 편히 쉬고 계시면 제가 설거지 하고 수민이 데리고 한 숨 잘게요.”


회사에 간다고 얘기 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아내라는 이 여자는 아침밥만 먹여주고 귀찮은 남편은 재워버리는 게 목적인가? 더 이상은 이 괴이한 놀이에 함께 장단 맞출 수 없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아내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제 잘 잤냐고? 아니. 난 며칠 째 전혀 잠을 자지 않았어….

당신은 늘 똑같은 차림에 똑같은 식사 준비에, 매일 나를 침실로 보내버리더군. 문까지 잠그고 말이야. 도대체 당신 속셈이 뭐야? 또 왜 이 빌어먹을 집구석은 자꾸 구조가 바뀌는 건데?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또 뭐야?”

“여보, 이러지 마요….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이러지 않기로 했다라…. 똑바로 말해봐!”

나는 불안함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며 음식을 잔뜩담은 그릇을 거칠게 쓸어버렸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야 할 식기는 콩,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살포시 떨어졌다.


“난 말이지, 당신, 이 주방에서 말고는 본 적도 없어. 연애한 시절도 모르겠고 결혼식 기억도 없어. 어떻게 수민이가 태어났는지도 전혀 모르겠어. 당신 누구야,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목적이 뭐야!”

아내는 아주 작은 소리로 흐느끼다가 그녀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내 손의 힘을 풀었다. 그 다음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러 눈물을 꾹 짜서 닦아내더니 의자에 다시 조용히 앉았다. 차분해진 아내를 보니 마음이 약해져 나도 내 자리에 다시 슬며시 돌아갔다. 그래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얼굴에 가득 표현한 채 아내를 무섭게 노려봤다. 아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