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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Jul 02. 2023

요가를 하다가 왜 다칠까?

우리의 몸은 원래 모든 아사나를 할 수 있었다


요가를 하다가 몸에 무리가 왔다던지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요가를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지도자 과정에서도 고난도 아사나 수련이나 특정 아사나를 너무 열심히 취하다가 다쳤다는 분들도 계셨다. 지금 다니는 요가원에서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지도하신다. 할 수 없는 동작을 하다가 다치기 쉽다고. 하지만 재작년 근막경선 인요가 클래스를 수강했을 때 인요가 선생님께선 요가를 하면서 다칠 수는 없다고 하셨다.


누구의 말이 과연 옳은 걸까?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왜 요가를 하면서 다치게 되는 건지를 따져야 한다. 인요가에서 내가 배웠던 사실은 우리의 몸은 굉장히 복잡하며 다양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매우 견고하며 계속해서 단련되고 발전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가득 담긴 신비로운 존재였다. 인요가 선생님께선 우리의 몸은 굉장히 강하고 단단하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요가 동작을 취한다고 하여 엄청난 부상을 당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럼 어떻게 사람들은 요가를 하면서 다칠까? 그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지은 바로는, 



욕심이 나의 몸을 앞질렀을 때 다치는 것이다.



사람마다 몸의 상태와 몸이 지내는 환경이 제각각 다르다. 자연 속에서 살아온 몸은 현대사회의 경직된 삶과 거리가 멀기에 몸의 열림이 깊어지기 쉬울 것이며 몸 자체가 스트레스를 덜 받아 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 속 몸은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이고 지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장시간 제자리에서 머물기 일쑤다. 이런 몸은 뻣뻣하고 근육들이 수축되어 있으며 몸 자체를 스스로 가누기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태에서 이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요가를 한다고 치면 누가 더 다치기 쉬울까?



사실 우리의 몸은 원래 모든 아사나를 할 수 있었다. 



아사나는 요가수련을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이며 우리 스스로를 탐구하고 성찰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아사나의 큰 특징은 장시간 오래 머물러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모든 아사나들은 그러한 특징이 있으며 결코 고통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란 이야기다.


하지만 극변한 생활방식과 여러 문물들로 인해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자연과 가까워질 수 없었고 오늘날의 거북목, 허리 디스크와 같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더 이상 자연의 곡선과 닮은 아사나를 하기가 수월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달라진 삶의 방식과 그로 인해 짧아진 근육들과 근막들. 미디어에서 봤던 화려한 요가 동작들 그 이면엔 어떤 노력과 수고로움이 더해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수련의 깊이와 시간도 함께 따져봐야 한다. 나도 모르게 우리의 몸에게 너무 많은 압박을 가해버리면 우리의 몸은 몸이 수용할 수 있는 가동성을 넘어 그 욕심의 무게에 짓눌리고 부서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요가를 하면서 다친다.


요가는 다치기 위함이 아니다. 아사나 또한 다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본래 모든 아사나를 할 줄 알았으나 달라진 생활 방식에 의한 경직됨과 수축이 아사나를 수행하기 힘들게 만들어버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차근차근 자연적인 곡선과 맞닿기 위한 걸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요가를 처음 배우거나 수련을 하려고 할 때 피트니스 센터나 필라테스 혼합된 곳이 아닌 정말로 요가 자체로만 하는 요가원에서 수련을 했으면 좋겠다. 오롯이 자신의 몸과 매트 위에서 하는 수련을 겪으며 천천히 호흡을 하며 리듬을 따라가는 그 순간의 여정들이 선사해 주는 근사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요가원에서만 요가를 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요가원에서 하는 수련은 그 어디에서 하는 수련보다 더 몰입감이 높고 요가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가원 만이 주는 그 독특한 아우라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요가원만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수련에 몰입을 하며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면 다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결국 나를 해치는 것은 나의 몸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몰아붙이는 나의 욕망, 에고 덩어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수련을 하면서 계속 그러한 마음을 눈치채고 나를 스스로 돌보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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