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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Mar 23. 2024

요가 선생님은 신이 아닙니다

요가 지도자나 선생님을 신처럼 여기지 말기를


나는 요가를 고등학생 때부터 접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나의 몸은 발 각도가 팔자를 넘어선 180도로 벌어진 상태였고 몸은 뒤틀린 데다, 척추측만증 초기에 하체비만까지 있었다. 거북목은 당연하고 골반은 거의 뒤로 젖혀져 걸을 때마다 뒤뚱뒤뚱거렸다. 그때를 회상하면 나의 몸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손을 잡고 집 근처 요가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몸을 처음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치 갓난아기가 걸음마를 떼듯이 수리야나마스카라 A 한 세트를 하는 것을 목표로 차근차근 교정과 빈야사요가를 시작했다. 나의 몸을 함부로 대한 대가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 대가를 치르는 동안 몸을 정상화하는데 들이는 나의 눈물과 비명은 처절했다. 우따나사나 전굴자세를 10분 버틸 때마다 나의 몸은 송장처럼 벌벌거렸고 땀구멍에서 나오는 땀방울은 내 몸이 우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의 고등학교 3년 동안은 걸음마 기간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 1학년때부터 2학년 그리고 첫 번째 휴학까지 3년은 본격적으로 아기가 뛰어다니는 뛰는 기간이었다. 이제 기본적인 골격이 맞춰지고, 기적적으로 골반이 돌아왔으며, 상하체 불균형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본격적인 근력을 붙이고 유연성을 위한 동작도 함께 들어갔다. 몸이 많이 좋아지면서 나는 나의 마음도 같이 돌볼 수 있는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요가와 함께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신'으로 여기고 무조건 맹목적인 사랑과 믿음을 바쳤던 요가 선생님과의 어긋남을 통해 나는 방황을 하고 요가 공백기 1년을 갖게 된다. 요가를 통해 얻은 나의 값졌던 인연은 거기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이 끝나고 맞이한 두 번째 휴학 생활에서 나는 요가지도자 과정을 밟았고 착실하게 수행한 끝에 값진 요가 자격증도 얻었다. 전공 공부 때문에 다른 분들처럼 요가에만 매진할 수 없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요가와 다시 인연을 맺고 요가를 통해 배운 값진 경험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다. 요가 선생님 그리고 지도자로서 요가수업을 진행하는 소중한 기회도 경험하고 전공과 또 다른 분야와 분위기에 나는 힘들지만 보람을 느꼈고 즐거워했다.


요가 강사라는 세계에 들어서니 그곳엔 또 다른 엄숙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요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무형의 '계급'. 어떤 요가원이 유명한가. 어떤 선생님이 무슨 요가의 대가인가. 요가 강사분들 사이에서 누구는 어디 요가원에서 수련을 하고, 수업을 하고, 어떤 워크숍을 듣고, 어떤 선생님께 TTC를 들었는지가 (Teacher Training Courses) 그 세계에서의 독특한 계급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수련을 20년 넘도록 수행한 '신'처럼 받들어짐을 받고 있는 요가 선생님들의 스승들 'Guru'가 있었다. 선생님들의 선생님. 이 칭호는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수련하고 노력을 하며 지금도 그 왕도를 걷고 계신 분들께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석연찮음은 의심에서 확신으로 변하게 된다. 요가 강사분들은 너무나 그 스승들의 가르침과 수련 경험 등등을 통해 감동과 감격한 나머지 그분들을 마치 '신'으로 추앙하는 태도도 보였다. 나는 여기서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지도자 과정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하고, 요가 수업을 위해 해부학과 시퀀스 공부를 하고, 나의 이론공부와 더불어 요가의 지혜를 몸의 지성으로 경험하기 위해 오늘도 요가 수련을 떠난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며 요가를 하는 평범한 인간들 중 한 명일 뿐이다.


그 스승들 또한 요가를 공부하고 수행하시는 한 사람의 인간이며 사람일 뿐이다.


스승이지만 그렇다고 그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중압감 때문에 그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떨 필요도 없다.

요가를 하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신도 요가를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오랫동안 그 길을 계속 걸어가기가 힘이 들뿐이다.


그렇다고 스승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마음까지 거두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분들을 너무 '신격화'를 하고, 요가의 '종교화'로 인한 너무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를 구축해 버리면 나중에 그 주춧돌들이 무너져 내렸을 때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요가라는 존재가 기피할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요가 선생님의 '신격화'의 오류와 맹목적인 요가에 대한 '우상숭배'로 인해 나 스스로를 추스르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를 보냈다. 그러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상처에 깊게 배이고 쓰라림에 몸부림도 쳐봤다. 고통스럽고 힘겨웠지만 다시 스스로 요가를 하고 싶은가에 대해 되물으며, 다시 요가에 다가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용기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타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는 나 스스로에게 바치길. 내가 지도자가 되면서 다행이라 느낀 점은 요가 선생님도, 지도자도 생각보다 별거 없더라는 사실이다. 요가 수련 외에도 수업을 구성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부분이 차이일지.


요가를 무기로 남들보다 우위에 선다, 남들보다 뛰어남을 자랑한다는 우월감과 자만심에서 내려와 내가 먼저 요가를 수행하면서 겪었던 경험들과 지식들을 함께 수련하는 수련자분들과 나눈다는 마음으로 매트에 선다.


기억하자, 스승들도 나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모두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과 넘치는 존경심은 나 스스로에게 바치자.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충분한 가치가 흐르는 소중한 인격체이자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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