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소식이 종일 뉴스를 도배했다. 바비, 마이삭, 하이선까지 3번의 태풍이 연이어 온다며. 신랑은 뉴스를 보자마자 우리 모두의 안전을 대비해야 한다며 베란다 창틀마다 조각조각의 박스를 끼워놓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열심히 창문을 고정시키는 신랑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신랑이 이래서 있는거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세상이 태풍으로 시끌벅적하던 때였다. 안타까운 뉴스가 연이어 터졌지만 다행히도 서울은 조용히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임신 10주차가 시작되고 있었고 생각보다 입덧은 조금씩 잦아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더부룩한 속 쓰림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임신 초기 중, 신랑이 제일 걱정하는 한 가지는 내가 보는 TV 영역이었다. 바로 내가 보던 미드와 영화 몇몇이 신랑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전부터 나는 좀비물과 스릴러, 이런 장르를 좋아했던 터. 물론 그런 영화들만 주욱 보아온 것은 아니다. 판타지 영화도 좋아하고 애니메이션도 좋아하여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임신 초기 접한 영화는 '진격의 거인'과 '아나콘다 1,2', '반도', '미드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였다. 아마 다른 임산부 분들이 이 글을 보면 정말 깜짝 놀랄 것이다. ;;;; 피해야 할 영화들을 다 보고 있으니 말이다.
신랑이 회사에 갔을 때, 회사 동료가 물었다고 한다. "요즘 형수님 태교 잘하고 계세요??" 그러자 신랑이대답했다.
"우리 와이프 요즘 진격의 거인 시리즈 보고 있어." 그리고 그분은 즉시, "네????????????????????????????????????????, 진격의 거인 시리즈가 재미있긴 하죠;;;;;;;;
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그러자 집에 돌아온 신랑은 나에게 부탁하듯 이야기했다. "아나콘다를 마지막으로 이런 건 이제 보지 말자 ㅡㅡ"
# 나는 임신 11주, 불청객은 1.1cm
몸 속에서 몰래 자라고 있었던 녀석을 만나다.
작년 여름, 결혼을 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신랑과 함께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검사 이후 나는 전혀 몰랐던 병명들을 몇몇 알게 되었다. 그 병들은 당장에 큰 병은 아니었지만 6개월에 한 번씩 추적검사를 필요로 했다. 대학 때부터 결혼해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던 나는, 내 몸을 돌보는 일에 전혀 무관심했기에 검진 이후에는 지금이라도 건강을 지키자며 6개월에 한 번씩 병원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때마침 예정되어 있던 정기검진일이었다.
너무나도 태연한 조금은 늦은 토요일 아침이었고, 별 대수롭지 않게 병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내 아무렇지 않음은 나만의 생각이 되어 있었다. 초음파를 보던 중 선생님은 "어?? 커졌네???"라고 놀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놀란 가슴을 안고 신랑과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용종이 커져서 이런 경우 수술을 해야 해요. 그런데 임신 중이셔서 이런 경우 앞으로 대학병원에서 추적관찰을 하며 진행하는 게 더 나아요"라며 대학병원 소견서를 써주셨다.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였을까.
며칠 뒤 도착한 대학병원에서도 답은 같았다. 진단결과는 쓸개 자체를 도려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1cm가 넘는 선종 용종은 암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어 최대한 빨리 수술을 권유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임신 중으로 할 수 없으니 3개월 간격으로 초음파 검사를 하며 과정을 지켜보고 출산 후 조금 회복이 되면 바로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모라고 말을 해야 할까.
눈 앞이 캄캄했지만 오히려 눈물도, 슬프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내가 해볼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불청객인 '그 녀석'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길 뿐이었다.
이 시기에, 유산을 하고 얻은 내 소중한 아이가 이제 겨우 내 몸속에서 꽈리를 틀어가며 태아의 모습으로 점차 자라고 있는데.. 왜 하필, 하고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건강을 지켜가며 아기를 보호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