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 (다시, 역사의 쓸모)

밤안개의 서재_5

by 밤안개

조선후기 명군 중 하나인 21대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입니다. 숙종의 정실부인 인현왕후의 하녀(무수리) 숙빈 최 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영조입니다. 숙종이 죽고 이복형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영조는 1724년 37세에 왕으로 등극되어 52년간 왕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역대 조선의 왕 중에서 최장수입니다. 영조는 붕당의 논쟁이 끊이지 않자 탕평책을 썼습니다. 그가 쓴 방법은 완론탕평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거지요.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 너는 잘못됐다."하고 눈이 시벌 걷게 쌍심지를 켜는 대신들을 향해 싸우지 말라고 다독거리거나 억눌렀습니다. 집권 50여 년간 그는 강해야 했을 것입니다. 신하들의 주장을 때로는 어스르고, 때론 강하게 질책해야 했을 겁니다. 그는 고독했을 것 같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태평성대는 강한 왕의 억눌린 절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조를 떠올릴 때 늘 꼬리처럼 생각나게 만드는 이가 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하고 세자로 生을 마감한 사도(思悼) 세자입니다. 영조의 첫째 아들은 효장세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효장은 죽고, 7년 만에 영조는 마흔이 넘어 아들을 갖게 됩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입니다. 그러니 영조는 사도가 얼마나 이뻤을까요? 정말 애지중지했습니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바로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사도세자에게 쏟은 사랑과 기대는 엄청났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 <사도>를 보면 정말 섬뜩합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영조의 얼굴만 봐도 아마 숨이 '헉'하고 막힐 겁니다. 사도세자로 분한 유아인의 정신착란 증세는 우리 자녀들한테 오히려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영조 같은 아버지라면 저라도 집을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자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 영조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공부, 성리학적 수준을 최고조로 높여 감히 왕 앞에서 신하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쩔쩔매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 영조가 원하는 아들의 모습입니다. 앉아 책 보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사냥과 무예를 익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아들의 모습은 영조의 머릿속에 없습니다. 부모의 상상대로만 커야 하는 요즘 우리 스카이 영재들의 앳된 모습이 오버랩되는 장면들입니다.


역사나 인생이나 참 알 수 없습니다. 불안에 싸여 살다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사도에게 '정조'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합니다. 정조가 왕으로 등극했을 때 정적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생각 思', '슬플 悼'입니다. 아들이 뒤주에서 숨이 막혀 죽었을 때 영조는 아들의 신분을 평민에서 다시 세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사도(思悼)라 칭 해주었습니다. 슬픔을 생각게 하는 이 곁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도의 아들 정조가 있었습니다. 정조는 영조와 달랐습니다. 정조는 준론탕평책을 썼습니다. 영조가 붕당을 무마시키는 것에 급급했다면 정조는 대놓고 붕당을 조장했습니다. 이야기해보라 하고 신하가 이야기하면 정조는 그 신하의 잘잘못을 촌천살인과 같은 말로 지적했습니다. "너는 이래서 틀렸고, 또 너는 저래서 틀렸다. 그러니 내 판단과 내 결정에 따르도록 해라." 뭐 이런 식이였습니다.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영조의 후광으로 정계에 힘 좀 뻗히려 했던 세력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할아버지 밑에서 내 아버지를 욕보인 놈들 잘 기억하라. '너희가 욕보인 내 아버지의 한(恨)을 난 결코 잊지 않고 있다.' 하는 메타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뒤편에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입니다. 그녀는 비정상적인 남편의 폭력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어린 정조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뜻은, 임금의 뜻을 이어받아 힘쓰고, 가다듬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성은을 갚는 일이고 또 네 아버님께는 효자가 되는 일이다. 이 밖에 더한 일은 없구나."


"서러울수록 보배로운 네 몸을 보호하거라. 비록 한이 많지만 스스로 착하게 행동하여 아버님의 한을 갚아라"

대개의 여인들은 영조 같은 시아버지에 대해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어디 노인네 두고 보자'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일반적인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끊어 오르 는 분노를 잠재우고, 그 아들에게 조차도 마음을 다스릴 것을 훈계했습니다. 《화성능행도》라는 여덟 폭의 병풍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7번째에는 <환어행렬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화성을 출발한 행렬이 시흥 행궁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정조가 직접 혜경궁 홍 씨에게 차와 음식을 올리기 위해서 행렬을 멈춘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정조가 어머니를 향해 얼마나 지극정성을 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본 《자산어보》라는 영화에서는 정약용이 잠깐 나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정약용은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등 수많은 글과 수원화성 축성이라는 한양도성의 축소판을 축조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이 인물 곁에는 정조가 있었습니다. 정조는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신자 정약용을 등용합니다. 그의 실력을 인정한 거죠. 권위나 규범을 깨뜨리고 오로지 인물의 재능을 귀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겪었던 모진 세월의 경험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나는 정조가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 후 23살에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족보에 양아들로 등극돼서 가까스로 왕이 된 후 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까요? 아버지가 내게 너무 잘해줘서 일까요?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혜경궁 홍 씨가 남긴 《한중록》에서 처음 남편의 묘를 찾으며 남긴 글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사유를 생각해 봅니다.


내 목숨이 갈수록 그지없고, 스스로 염치없이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웠다. (...) 천만 가지 어렵고 힘든 기운데 (정조는) 무사히 성장하여 보위에 오르셨다. (...) 당신의 골육을 간신히 보존하여 거느리고 와서 내가 당신 자녀의 성취함을 마음속으로 알렸다. 이 한 부분은 내가 살아 있음이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정조가 뒤주에 긷힌 사도에게 말합니다. 아버님, 아버님의 며느리가 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을 드시 옵소서. 목을 축이옵소서 하고 울부짖습니다.


*이글은 2024.11.5. 블로그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여기 다시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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