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의 서재_4
스무 살 나는 대학 옆 허름한 서점 안에 있습니다. 낡은 종이냄새로 쾌쾌한 서점에서 한참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은 내려놓고 눈길을 돌리곤 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30년 만에 이 책을 한림읍 무인책방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음문고판을 사서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아! 나는 무엇을 독서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때 나는 사회과학서적으로 인생의 반쪽만 채우고 있었네요. 생텍쥐페리는 사막에서 홀로 호흡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써 내려갔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가요? 사막, 호흡마저도 메마른 세포들 조차도 점차 희미해지는 죽음의 순간까지 써 내려간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여기 옮겨 적습니다. 부끄럽기만 합니다.
(p34) 우리는 우주 한복판에서 도무지 가 닿을 수 없는 100개의 행성들 가운데 길을 잃고 떠도는 듯했다.
(p54) 네게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헤아려보면 재물로는 절대 얻지 못했을 순간들이 반드시 떠오른다. 메르모즈와 같은 사람과 나눈 우정, 함께 겪은 시련으로 쌓은 동료와의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야간비행, 밤에 빛나던 무수한 별들, 그 정적 몇 시간 동안 맛보았던 절대적인 힘,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어려운 고비를 넘긴 후 보이는 새로운 세상, 그 나무들, 꽃들, 여자들, 새벽녘 우리가 막 되찾은 삶으로 싱싱하게 채색된 그 미소, 우리 고생에 보답해 주는 작은 것들이 이루는 합창, 이런 것들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
(p71)"맹세컨데, 내가 해낸 일은 짐승이라면 절대 못해냈을 걸세" 내가 이제껏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이 한 마디,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을 칭송하고 진정한 서열을 매겨주는 이 말이 기억나네. 마침내 자네는 잠들었지. 의식은 잠들었지만, 자네가 깨어날 때면 이 파괴되고 쪼그라들고 시꺼멓게 타들어간 육신으로부터 되살아난 의식이 다시금 육신을 지배하게 되겠지. 그러면 육신은 좋은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순한 하인에 불과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기요메 자네는 그 좋은 도구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할 줄도 알았네.
"음식을 못 먹으니, 상상해 보게나, 걷기 시작한 사흘째 되는 날... 심장이 힘차게 뛸 리가 없지... 그런데 말일세! 깎아지른 비탈에 매달려서 주먹을 쑤셔 넣을 구멍을 파며 올라가는데, 갑자기 심장이 간당 간당하는 거야. 머뭇머뭇하다가 다시 뛰는 걸세. 그러면서 불규칙하게 뛰는 거야. 놈이 1초만 더 머뭇거리면 손을 놓아버리고 말겠더군. 그래서 꼼짝하지 않고 내 속에 귀를 기울였어. 비행기를 몰 때는 말일세. 절대로, 내 말 듣나? 절대로, 그 몇 분 동안 심장에 달려 있듯 엔진에 그렇게 가까이 매달려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네. 나는 내 심장에게 말했지. 자, 조금만 힘내! 좀 더 뛰어보라니까... 그런데 놈이 아주 고품질 심장이었단 말이지! 머뭇거리다가 매번 다시 뛰더라니까... 이 심장이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자네가 알기나 할까?"
(p138) 사막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그건 우리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무엇이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그 무엇, 그날 밤, 우리 역시 어느 사촌 누이와 대위를 사랑하게 되었다.
(p165) 뜨거운 낮이면 밤을 향해 걸어가고, 벌거벗은 차가운 별들 아래에서는 뜨거운 낮을 꿈 꾼다. 사계절이 있기에 여름이면 눈의 전설을 지어내고 겨울이면 태양의 전설을 지어내는 북쪽나라들은 행복하고, 언제나 뜨거운 열기 가득한 남쪽 열대지방은 슬프다. 하지만 낮과 밤에 따라 인간이 이 희망에서 저 희망으로 그토록 간단히 오가는 이 사하라 사막 역시 행복하다.
(p253) 비행기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사람은 비행기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농부가 밭일을 하는 것이 수레를 위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행기를 이용해 도시와 도시의 회계사들을 떠나서 농부의 진실을 재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비행사들은 인간의 일을 하며 인간의 근심을 안다. 우리는 바람과 별과 밤과 모래와 바다를 상대한다. 비행사는 자연의 힘에 맞서서 머리를 쥐어짠다. 정원사가 봄을 기다리듯 우리는 새벽을 기다린다. 약속의 땅이라도 되는 양 기항지를 기다리고, 별 속에서 진실을 찾아 헤맨다.
(p289) 우리는 우리를 넘어선 공동의 목적으로 형제들에게 연결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숨을 쉰다. 경험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같은 줄에 묶여 서로 만나게 될 일, 같은 정상으로 나아갈 때에만 그들은 동료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 풍족한 시절에 마지막 남은 식량을 사막에서 나누어 먹으며 그토록 충만한 기쁨을 느낀단 말인가? 이에 반하는 사회학자들의 예측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사하라 사막에서 구조되는 그 크나큰 기쁨을 누린 사람에게는 다른 모든 즐거움이 하챦게 보였다.
(p293) 여러분도 알다시피 진리란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지 혼돈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진리는 보편적인 것을 드러내는 언어다. 뉴턴은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아내듯 오랫동안 숨어있던 법칙을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가 이루어낸 것은 어떤 창조 활동이다. 사과가 들판으로 떨어지는 것과 태양이 뜨는 것을 동시에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를 확립해 낸 것이다. 진리란 증명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라 단순 명료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아내가 한립읍에 유일하게 있는 한수풀동물병원에서 강아지 진료를 받는 동안 파출소 옆 무인서점에 들렀습니다. 학생처럼 보이는 소녀가 책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마음이 갑니다. 35년 전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중간에 낡은 서점이 있었습니다. 항상 들러가는 서점입니다. 담배사고 남은 돈이 있으면 돈에 맞춰 시집을 샀는데 늘 <인간의 대지>는 구매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었으나 결국 사지 못했습니다. 그때 이 책을 샀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 소녀는 무슨 책을 사갔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그 세대에서 추천해 줄 책을 부탁했는 그녀는 내게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민음사에서 나온 <소설보다 :가을 2025> 3권을 추천했습니다. 그중 <디디의 우산>과 <소설보다 : 가을 2025> 2권을 사서 읽었습니다. 추천해 준 이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나는 그녀에게 한강 시집 한 권을 선물해 줬습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입니다. 그녀는 고3이라고 했고, 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꿈을 오십 넘어까지 간직했으면 합니다. 중간에 꿈이 분절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7장 사막 한가운데서>를 다시 읽고(26.2.4)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와 그의 동료 앙드레 프레보를 태운 비행기는 리비아 벵가시~이집트 카이로 직선 항로 위 황량한 어느 고원의 완만한 비탈에 거의 접선으로 충돌하여 추락합니다. 황량한 사막에 고립된 그들은 무작정 60km, 80km, 100km를 동북쪽으로 왕복하며 물, 호수, 사람의 구원을 찾아 걸어갑니다. 마시지 않고 19시간을 버틸 수 있다는 장교의 말도, 뜨거운 태양과 온몸을 파고드는 밤의 공포도 한 인간의 감수성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p252) 사랑하던 그대들이여, 나는 이제 작별을 고한다. 사람의 몸이 물을 마시지 않고 사흘을 못 버티는 게 어찌 내 탓이랴. 나는 내가 샘물의 포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곧장 떠나버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간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탯줄처럼 대지의 배에 이어진 우물, 우리는 그 우물에 연결하는 밧줄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면 죽어버리고 만다.
나는 생텍쥐페리가 쓴 이 글들 속에서 사막에 홀로 남았을 때 그가 느꼈던 따듯한 인간애에 대해 깊이 감동하고 있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서 물도, 식량도,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이 절막한 상황에서도 그가 글을 썼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합니다. 한 인간이 경험한 사막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게 될 사막입니다. 고독, 외로움은 육체의 갈증과 배고픔으로 이어지지만 작가는 인간애와 감수성을 잃지 않습니다. 사막의 모래는 어둠과 별은 그에게서 사막여우를 만나게 했고, 어린 왕자를 상상하게 했습니다. 그가 쓴 <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에게서 나는 인생의 참 진리를 배웁니다. 돈 권력 성공 이런 것들에 대한 미련은 한 줌 모래를 움켜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쥐면 빠져나와 대지에 섞이는 먼지와 같습니다. 이 년 전 내가 본 사막은 한 줌 없어질 공기와 먼지였습니다. 나는 사하라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욕심, 욕망, 미움, 두려움, 슬픔, 괴로움, 심지에 외로움 마저 다 버렸습니다. 돌아갈 집과 아내,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 결혼해 독립해 살지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동생들 가정이 있어서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료 앙드레 프레보가 서럽게 울었던 이유처럼 말입니다.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남
1921년 항공부대 정비사로 입대
1926년 조종사로 프랑스 툴루즈에서 아프리카 다카르까지 우편물 항공수송
1929년 아르헨티나 기지 책임자로 임명
1939년 <인간의 대지> 발표
1941년 미국 망명시기 <전시 조종사>, <어린 왕자> 발표
1944년 7월 31일 독일군 전투기 사격을 받고 지중해로 추락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