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6
But
My team is very good
서둘러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같은 참가 기업들의 프레젠테이션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전날의 폭음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터라,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늘이 도운 기분이었다.
진흥원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각 기업 부스에는 전문 통역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통역사분께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VR 기기 설명과 방문객 응대를 모두 맡겼다. 그러고는 오로지 발표 대본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틈틈이 강의실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슬쩍 들어가 현장의 공기와 분위기를 익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감 넘치는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저녁에는 개척단 일행과 함께, 박지성 선수의 단골집으로 유명한 한식당 ‘코리아나(Koreana)’에서 식사를 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나는 어김없이 다시 ‘더 페브릴 오브 더 피크(The Peveril of the Peak)’로 향했다. 시원한 기네스 한 잔을 앞에 두고 다시 대본을 펼쳐 들었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이 아니라, 영국의 유서 깊은 펍에서 공부하는 이른바 ‘펍공족’이 된 셈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일어나 숙소 근처 ‘프렛(Pret A Manger)’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 들고 컨퍼런스장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어제와는 달리 현장의 공기가 사뭇 달랐다. 묘한 긴장감과 어수선함이 감돌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오늘은 영국 디지털문화미디어체육부의 마고 제임스(Margot James) 장관이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귀빈이 올 때 유난스럽게 분주해지는 건 한국이나 영국이나 매한가지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장관의 방문에 맞춰 취재를 나온 영국의 주요 미디어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그들은 느닷없이 한국에서 온 기업들을 인터뷰하겠다며 한 회사씩 불러내기 시작했다. 강당 구석에서 오로지 대본 암기에만 매달리고 있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주최 측의 손에 이끌려 카메라 앞으로 끌려 나갔다.
현지 언론의 쏟아지는 질문 앞에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아찔하고 진땀 나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멘탈이 무참히 털린 채로, 나는 드디어 결전의 무대가 마련된 컨퍼런스 홀 안으로 입장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단상에 오르는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고질적인 무대 울렁증은 심장을 터뜨릴 듯 요동치게 했고, 앞서 겪은 돌발 인터뷰의 충격으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이미 바닥을 친 상태였다. 영국의 장관을 포함해 수백 명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는데, 한 달 내내 잠꼬대처럼 뇌에 새겼던 첫 인사말조차 단 한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숨이 가빠오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절체절명의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입술이 떨어졌다. 외웠던 대본에는 어디에도 없던, 날 것 그대로의 사과였다.
“I am sorry.”
진심이었다.
“Because my English is not good.”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뱉은 고백이었다.
“But my team is very good.”
순간, 이곳이 회사를 대표하는 발표 자리라는 자각이 본능적으로 애드리브를 끌어냈다.
그 찰나, 경직되어 있던 강의장 안에 유쾌한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청중들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대체 어느 지점이 그들의 웃음 버튼을 건드린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 없었으나, 그 짧은 소음이 마법처럼 온몸을 옥죄던 긴장을 스르르 녹여주었다. 비로소 호기심 어린 청중들의 눈빛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멈췄던 태엽이 다시 감기듯 달달 외웠던 도입부를 기억해냈고, 기세 좋게 프레젠테이션의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의 발표는 내 인생에서 제법 성공적인 영어 프레젠테이션으로 기록되었다.
모든 기업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여느 행사와 다름없이 의례적인 단체 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셔터 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나는 서둘러 부스를 철수하고 호텔로 향했다. 쉴 틈 없이 다음 여정인 아랍에미리트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까의 무대를 천천히 복기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애초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외국인인 나에게 완벽한 영어를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궁금해한 것은 '나'라는 개인의 언어 실력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맘모식스의 혁신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그저 정성껏 준비한 그 메시지를 성실히 배달하는 역할만 완수하면 될 뿐이었다.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영어를 할 때 더 이상 쫄지 않게 되었다. 상대가 누구든 그들은 메신저인 나의 '외형'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의 본질'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음이 조금 투박해도, 문법이 조금 어긋나도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같은 기우는 더 이상 나를 가두지 못했다.
영어를 잘하진 못해도 기세 좋게. 그렇게 나의 오랜 영어 울렁증은 맨체스터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한층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다음 여정을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뜨거운 사막의 나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 이상한 중동의 앨리스 1'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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