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맨체스터 : 영알못에게 닥친 시련 2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5

by chill십구년생guy


Glory,
Glory Man United!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전율 넘치는 투어를 마치고 다시 맨체스터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투어 내내 전설적인 구장의 공기를 마시며 가슴 속엔 뜨거운 팬심이 차올랐지만, 정작 내 두 귀는 영국 본토 억양이 짙게 밴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가느라 녹초가 되어버렸다. 마치 한 시간 내내 고난도의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른 기분이었다. 구장을 나서자마자, 잠시 잊고 있었던 영어 프레젠테이션의 압박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먹는게 남는거



초조함을 달래는 데는 역시 맛있는 음식만 한 것이 없다. 마침 근처에 영국을 대표하는 스타 셰프 제이미 올리버의 레스토랑, ‘제이미스 이탈리안(Jamie’s Italian)’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적인 건물을 개조해 만든 덕분에 레스토랑의 실내 분위기는 무척이나 고풍스럽고 근사했다. 솔직히 말해 미각을 뒤흔들 만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맛’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한 여타 영국 음식들에 비하면 이곳의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살아있었다. 덕분에 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체인은 2019년에 폐업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고든 램지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건물 자체의 분위기가 꽤 근사했어서, 뭐로 바뀌었던 재방문 의사 있음



기분 좋게 배를 채운 뒤에는 근처의 유서 깊은 펍, ‘더 페브릴 오브 더 피크(The Peveril of the Peak)’에서 기네스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가족 대대로 운영되어 온 이곳은 영국 최고의 펍 1위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명소라고 했다.


화려한 명성 탓에 꽤 북적일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마주한 펍의 공기는 의외로 차분했다. 오랜 단골들만이 아지트처럼 찾아올 법한 한적하고 클래식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 편안한 여운이 깊게 남아, 맨체스터에 머무는 동안 일부러 한 번 더 찾아가 잔을 기울였을 정도였다.



손님들에게서 단골의 포스가 뿜뿜



이튿날 오전, 본격적인 프로그램 일정이 시작됐다. 개척단에 합류한 다른 기업 대표님들과 함께 영국 현지의 주요 VR 및 3D 모델링 업체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들의 비즈니스 전략을 청취하고, 실제 서비스 중인 콘텐츠를 직접 체험하며 기술의 최전선을 살피는 시간이었다.


방문했던 영국 업체들은 일반 소비자 대상의 시장보다는 B2B 분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비행기 정비와 같이 고도의 전문성과 정밀함이 요구되는 영역에서 VR을 활용해 훈련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압도적인 효율의 트레이닝 환경을 구축해낸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이들의 접근 방식은 훗날 우리 플랫폼 ‘갤럭시티’ 안에서 안전 훈련 콘텐츠를 기획하고 구체화할 때 결정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오후에는 견학 차 근교 쇼핑몰에 위치한 IMAX VR 매장을 들렀다. 사실 콘텐츠 자체는 이미 익숙한 것들이 주를 이뤄 큰 감흥이 없었지만, 엉뚱한 곳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엔 도입되지 않은 애플페이가 결제 수단으로 일상화되어 있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것이다. 한 사람의 앱등이으로서, 낯선 땅에서 마주한 그 편리한 결제 시스템이 내심 반가우면서도 묘한 부러움을 자아냈던 기억이 선명하다.



삼성페이를 마냥 부러워하던 앱등이가 희망의 빛을 본 날



그날 저녁, 글로벌 개척단의 사전 회식이 열렸다. 처음에는 스포츠 펍에서 가벼운 플래터 요리에 맥주 한 잔만 곁들이고 일찍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서 맨유의 전설적인 경기 하이라이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비록 지난 경기였음에도 골망이 흔들릴 때마다 식당 안은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펍의 열기는 순식간에 축제의 한복판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흥이 오른 일행은 결국 자리를 옮겨, 인근의 유서 깊은 펍 ‘더 솔즈베리(The Salisbury)’에서 2차를 이어갔다. 한국인의 남다른 ‘흥’을 본토에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기세로 잔을 부딪치다 보니,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빈 맥주잔이 산처럼 쌓여갔다. 그 진풍경을 구경하던 영국인들이 신기한 듯 다가와 사진을 찍어갈 정도였으니, 그날 밤 우리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자 달리자, 맨체스터의 형제들이여!




다음 날 아침, 천근만근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눈을 떴다. 속이 울렁거릴 때마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시는 술 안 마신다. 오늘부터 진짜 금주다.’ 늘 그렇듯 익숙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술꾼들의 전형적인 자기암시를 되뇌었다.


화장실로 들어갔더니 호텔 측의 실수였는지 수건이 교체되어 있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한편에 있던 여분의 타월로 대충 샤워를 마치고는, 침대맡에 앉아 수건 교체를 부탁하는 짤막한 메모를 영어로 끄적였다. 그 순간, 오늘부터 컨퍼런스의 메인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마으마한 숙취 중에 스펠링 안틀려서 다행



‘영어 프레젠테이션.’


그 단어 하나가 불쑥 떠오르자, 숙취에 밀려 잠시 잊고 있던 중압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금세 정신이 번쩍 들었고, 밤새 뇌를 멍하게 만들었던 술기운은 신기할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결전의 장소인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를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다음편, '영국 맨체스터 : 영알못에게 닥친 시련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 /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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