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4
I am sorry because
my english is not good
나에게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두 가지 울렁증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다른 하나는 극복해 냈다.
첫 번째는 무대 울렁증이다. 스타트업의 숙명상 크고 작은 무대 위에서 회사의 비전을 증명해야 할 일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하는 순간의 중압감은 매번 낯설고 긴장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개그우먼 장도연이 전수한 마법의 주문을 떠올린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ㅈ밥이다.” 이 발칙한 자기암시를 되뇌고 나서야, 나는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마이크를 잡는다.
두 번째는 영어 울렁증이다. 다행히 이 녀석은 한참 전에 떨쳐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영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내 영어는 파파고와 챗GPT의 번역 품질에 명줄을 대고 있으며, 실전 회화는 '여행자 수준'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다. 그런 내가 글로벌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울렁증을 단숨에 잠재운 결정적인 사건은 2018년 6월에 일어났다.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가 주최한 국제 컨퍼런스 현장. 수많은 교수와 학생, 업계 관계자들은 물론 영국의 현직 장관(!)까지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 나는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그날의 강렬한 경험은 오랫동안 나를 옥죄던 영어라는 사슬을 단칼에 끊어내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영어는 기세다!
2018년 5월, 경기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VR·AR 창조오디션’을 통해 NRP(Next Reality Partners)에 선발된 우리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모집 중이던 ‘글로벌 개척단’에 지원했다. 성장의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믿었기에, 견문을 넓히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나는 지난 9개월 동안 독일, 일본, 대만, 스페인 등 다양한 국가를 누비고 다닌 상태였다. ‘해외에서의 경험은 반드시 유의미한 비즈니스 성과로 귀결된다’는 일종의 맹목적인 믿음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모집하는 대상국은 영국과 아랍에미리트. 마침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두 국가 모두 신청서를 던졌고, 당당히 참가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선발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글로벌 개척단은 단순한 참관이나 전시 체험 수준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특히 영국의 경우, 다음 달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열리는 ‘제4회 국제 AR·VR 컨퍼런스(The 4th International ARVR Conference)’에 참가해 쇼케이스를 열고 직접 프레젠테이션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발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맙소사, 영어의 본고장에서 영어로 발표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프롤로그에서 고백했듯, 나는 전형적인 ‘영알못’이었다. 스마트폰의 번역 앱 없이는 해외여행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을 수준인 나에게, 영어 프레젠테이션은 그야말로 거대한 장벽이자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었다.
주어진 준비 기간은 단 한 달. 나는 PPT 슬라이드 흐름에 맞춰 영어 대본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무대 울렁증까지 있는 터라 현장에서 대사가 꼬이는 일만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학창 시절 영어 단어장을 통째로 씹어 먹듯, 틈만 나면 대본을 꺼내 들고 중얼거리며 뇌에 새기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출국 날, 생애 처음으로 에미레이트 항공에 몸을 싣고 두바이를 경유해 맨체스터로 향했다. 환승을 위해 머물렀던 두바이 공항의 화려한 풍경도 나에겐 사치였다. 공항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혹시나 단어 하나라도 휘발될까 봐 대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어차피 다음 일정으로 다시 올 곳이니 그때 구경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당장 내 머릿속은 오직 눈앞으로 다가온 영국 무대뿐이었다.
한편, 나는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의 오랜 열혈 팬이다. 1990년대 초반 ‘데이비드 베컴’의 화려한 플레이에 매료되어 맨유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2005년 우리의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입단하면서 내 팬심은 절정에 달했다. 세월이 흘러 베컴과 박지성이 팀을 떠났음에도, 팀을 향한 나의 애정은 여전히 뜨거운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나에게 맨체스터 방문은 비즈니스를 넘어 개인적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사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체류 기간 중 경기 일정은 없었지만, 지난 2월 바르셀로나에서 캄프누(Camp Nou)를 성지 순례하듯 찾았던 것처럼, 맨체스터까지 와서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Old Trafford Stadium)’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공식 일정은 도착 다음 날부터였기에, 첫날은 투어를 겸한 시내 관광으로 예열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발표에 대한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맨유를 향한 덕심이 그 긴장감을 압도했다. 나는 잠시 손때 묻은 영어 대본을 내려놓고,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곧장 길을 나섰다.
맨체스터 피카딜리(Piccadilly) 역에서 퍼플 라인 열차를 타고 트래포드 바(Trafford Bar) 역에 내려 조금 걷자, 마침내 꿈에 그리던 올드 트래포드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예약한 투어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입구 옆 매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했다. 영국에 왔으니 당연히 ‘피시 앤 칩스’를 주문했는데, 과연 악명 높은 소문대로 맛이 참으로 ‘정직하게’ 없었다.
‘남은 일정 동안 실망하지 않으려면, 매 끼니 진지하게 맛집을 수색해야겠군.’
유달리 퍽퍽한 대구살과 밍밍한 감자튀김을 꾸역꾸역 씹으며, 나는 비장하게 다짐했다.
다음편, '영국 맨체스터 : 영알못에게 닥친 시련 2'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 / 금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