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3
정말이야,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
바르셀로나 출장 6일째 새벽. 나는 아직 잠 기운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친구를 흔들어 깨워 내 턱에 난 상처를 들이밀었다. 피부가 워낙 얇은 부위라 그런지, 찢어진 상처 틈 사이로 하얀 뼈가 희미하게 비칠 정도로 깊게 패어 있었다.
사고는 한밤중에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잠결에 화장실에 가려 일어났던 나는, 바닥에 고여 있던 물기를 미처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턱은 날카로운 대리석 세면대에 정면으로 부딪혔고, 나는 그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입고 있던 잠옷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턱의 상처보다 더 큰 걱정이 머릿속을 채웠다. 혹시 내부에도 이상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엑스레이라도 찍어보고 싶었지만, 해외 병원비가 상상을 초월할 거라는 공포가 발목을 잡았다.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그제야 여행자 보험을 들지 않고 떠나온 과거의 나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날 이후, 나는 5일 이상의 여행을 떠날 때면 무조건 여행자 보험부터 결제하는 습관이 생겼다)
결국 병원행을 포기하고 약국에서 소독약과 밴드를 사 임시방편으로 처치를 마쳤다. 감기약을 먹고 숙소에서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친구는 숙소 근처 노르드 버스 터미널(Nord Bus Station)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를 보러 가겠다는 그를 배웅하고 혼자 남겨지자, 낮게 깔린 불안감이 엄습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메스꺼우면 뇌진탕일 수 있다’는 경고 문구들이 천장에 떠다니는 것만 같아 괜스레 긴장이 곤두섰다.
다행히 저녁까지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친구는 촬영지의 장엄한 풍경과 버스터미널에서 사기꾼을 만났던 아찔한 무용담을 신나게 쏟아냈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부러움 섞인 눈으로 친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만약 낮 동안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이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면 나도 충분히 즐거웠을 텐데….’
그 찰나의 아쉬움 속에, 내내 마음 한쪽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고민 위로 한 줄기 빛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모리츠 맥주 공장(Fàbrica MORITZ Barcelona)’을 찾았다. 출장 기간 중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싶을 때마다 종종 들렀던 곳이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비어 캔 치킨’은 그 맛이 워낙 특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바르셀로나식 치맥’의 정점을 찍고 싶었다.
갓 구워진 치킨이 테이블에 오르고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동행한 친구이자 대표가 먼저 정적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한국 돌아가면, 우리 이제 뭐 하죠?”
기다렸다는 듯, 나는 지난 일주일 내내 가슴속에 품어왔던, 그리고 조금 전 침대에 누워 복기했던 생각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럼 돌아가서 멤버들이랑 다 같이 이야기해 봅시다.” “이게 당장 돈이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반대 안 해요?” “우리가 언제부터 돈이 된다는 보장이 있어서 도전했나요.”
그의 덤덤한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누며 시작했다. 사업은 수익을 쫓는 일이지만, 스타트업은 ‘도전의 전율’을 먹고 사는 일이라고. 전례 없는 위험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무모함이 있기에 국가의 지원이 따르고 투자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험난한 기술의 최전선이 아니라 안정적인 장사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10개월 전, 게임 개발에서 VR로 피벗을 결심하던 그 밤에 우리가 나눴던 약속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동안 스스로를 ‘대감집 머슴’이라는 틀 안에 가둬두고, 그 안락함에 취해 초심을 잃고 지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그는 “하다가 돈 떨어지면 다시 외주하면 되지 뭐”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멤버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공유했고, 지체 없이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에 돌입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명확했다. VR로 구현된 가상 공간에 다수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해 소통하고, 함께 콘텐츠를 즐기며 경험을 공유하는, 말 그대로 ‘하나의 연결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시 해외에는 이미 ‘소셜 VR’이라는 이름으로 ‘VR Chat’이나 ‘Rec Room’ 같은 프로젝트들이 태동하고 있었지만, 국내 업계는 유독 오프라인 테마파크 시장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온라인 기반의 소셜 가상 세계를 꿈꾸는 우리의 시도는 국내에서 사실상 ‘개척자’의 길이었고, 그것은 곧 맘모식스만의 독보적인 ‘풍’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받은 시각적 충격을 잊지 않기 위해, 가상 공간의 비주얼 테마만큼은 반드시 ‘유럽풍 도시의 정취’를 담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우리가 완성한 결과물을 S전자의 생태계에 슬쩍 얹어보겠다는 다분히 전략적인(혹은 불순한) 의도를 담아, ‘갤럭시(Galaxy)’에 ‘시티(City)’를 결합한 ‘갤럭시티(Galaxity)’로 낙점했다. 이 이름은 도시의 역동성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훗날 브랜드로서도 독보적인 상징성을 획기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우리는 이 ‘갤럭시티’를 앞세워 그해 5월, 경기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경기 VR·AR 창조 오디션’에서 당당히 선발되었다. 무려 1억 5천만 원이라는 제작 지원금을 확보한 데 이어, 두 달 뒤인 7월에는 두 번째 투자 유치까지 성공하며 스타트업으로서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단순한 외주 지원 여행인 줄 알았던 바르셀로나의 여정은, 결국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목표’와 비약적인 성장을 선물해 준 셈이다.
그리고 이 오디션 선발의 특전 덕분에, 나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새로운 여행을—이번에는 팀원이나 친구 없이 ‘홀로’ 떠나게 된다.
다음편, '영국 맨체스터 : 영알못에게 닥친 시련 1'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 / 금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