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1
이번에 인수된 맘모식스는…(중략)
‘갤럭시티’를 서비스 하고 있다
2021년 5월, 맘모식스가 카카오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는 엑시트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때, 회사명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단연 ‘갤럭시티(Galaxity)’였다.
갤럭시티는 2018년 첫선을 보인 ‘베타(Beta)’를 시작으로 스쿨(2021), 쇼핑(2022), 어스(2022) 등 다양한 라인업을 구축하며 맘모식스의 전성기를 이끈 핵심 브랜드다. 이전까지 우리가 개발했던 테마파크용 VR 게임들과는 궤를 달리하며, 포털 사이트 연관 검색어에 오를 만큼 회사의 명실상부한 간판 역할을 해냈다.
사실 스페인 땅을 밟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같은 작은 스타트업이 이토록 공고한 ‘브랜드’를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8년 2월, S전자의 MWC 2018 VIP 전시를 지원하기 위해 떠났던 바르셀로나 출장은 나에게 ‘스타트업이 생존을 넘어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지난해 IFA 2017 전시 보도자료가 인연이 되어, 우리는 S전자와 정식 계약을 맺고 콘텐츠 개발에 착수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2월 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MWC 2018에서 S전자의 VIP 고객들에게 공개할 (비공개) 신규 기기용 시연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마감은 2월 중순이었다. 그해 겨울 내내 작업에 매달렸지만, 우리에게 전달된 시제품은 펌웨어를 비롯해 크고 작은 결함이 적지 않았다. 개발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류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은 매 순간이 가시밭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감 직전 납품을 마쳤으나, 현장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반 관람객이 아닌 VIP만을 대상으로 한 극도의 보안과 중요도가 요구되는 시연이었기에,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즉각 대응하고 콘텐츠를 수정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결국 나는 나머지 팀원들을 한국에 비상 대기시킨 채, 친구인 대표와 단둘이 현장 지원을 위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 항공사 아에로플로트(Aeroflot)를 타고 모스크바를 경유해 긴 여정 끝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일주일간 우리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숙소는 개선문(Arc de Triomf) 역과 노르드 버스 터미널(Nord Bus Station) 사이, 현지인들의 삶이 묻어나는 주거 지역의 에어비앤비 아파트로 정했다.
도착하니 마침 점심 무렵이었다. 체크인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던 터라 짐을 맡겨두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스페인 땅을 처음 밟았으니 고민할 것도 없이 현지 음식을 맛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스페인의 상징인 빠에야와 바르셀로나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삶은 문어 요리(뽈뽀)를 주문했다.
처음 마주한 본토의 빠에야는 상상 이상이었다. 진한 해산물의 풍미가 촉촉하게 배어든 밥알, 그리고 팬 바닥에 고소하게 눌어붙은 부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우리는 게 눈 감추듯 접시를 비워냈고, 그 강렬한 첫인상 덕분에 출장 내내 틈만 나면 시내 곳곳의 빠에야 맛집을 찾아다니는 ‘빠에야 사냥꾼’이 되었다. 한동안은 말을 할 때마다 입안에서 은은한 강황 향이 감도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금요일 오후, 막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참이라 본 행사 시작까지는 주말을 포함해 약 3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우선 S전자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현장은 전시장 부스 공사가 한창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바로 달려가겠다고 제안하자, 예상 밖의 답변이 이어졌다.
세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우리가 가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일단 편하게 쉬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와의 계약 관계는 하도급 관련 법령상 오버워크를 요청하기 조심스러운 입장이며, 스페인 현지 시간으로 정오가 지나면 한국은 이미 퇴근 시간대이니 오전 대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후 시간이 통째로 자유라니. 이건 출장이라기보다 거의 여행에 가까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머슴살이도 대감집에서 하라’더니,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외주 업체라는 '머슴'의 컨디션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다니, 대한민국 최고의 대감집다운 풍모였다. 나는 속으로 깊이 읊조렸다.
'오래오래 저희를 먹여 살려주시옵소서, 대감마님.'
토요일 오전은 아주 느긋하게 보냈다. 전날 밤늦도록 고딕 지구 대성당 뒷골목의 한 스테이크 집에서 친구와 샹그리아를 진탕 마신 탓이었다. 숙소 거실 TV에 닌텐도 스위치를 연결해 게임을 즐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현장 정리가 마무리되어 오후쯤이면 세팅 상태를 점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우리는 상대적으로 여유를 누린 것이 내심 미안해,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시느라 고생이 정말 많으십니다”라며 인사치레를 건넸다. 그러자 담당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수당도 넉넉히 받고 행사 뒤에는 휴가도 예정되어 있어 괜찮다고, 오히려 다른 일로 바쁠 텐데 바르셀로나까지 직접 지원을 나온 우리야말로 수고가 많다며 치켜세워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빡세게 스타트업에 도전하시는 분들 보면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일렁였다. 도전? 내가 지금 특별히 대단한 도전을 하고 있었나? 사실 이번 외주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우리 팀은 한동안 이렇다 할 작업 일정이 없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앞날이 붕 떠 있는 시기였다. 살림이 넉넉한 대감집 식구들도 이토록 주말까지 반납하며 성실하게 현장을 지키고 있는데, 명색이 스타트업이라는 우리가 이렇게 널널하게 지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스타트업의 길을 택했을까. 평생 남의 물건이나 대신 만들어 납품하고, 프로젝트 하나 끝날 때마다 안도하며 한숨 돌리는 삶. 그런 삶을 살려고 이 거친 바닥에 뛰어든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머슴으로 살고 있는 현실의 나’와 ‘도전하는 모습으로 존경받는 상상 속의 나’ 사이의 거리가,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다음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 대감집 머슴의 깨달음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 / 금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