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 : 꽌시 대신 미래시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0

by chill십구년생guy


오전엔 좀 쉬엄쉬엄 합시다.
꽌시도 물 건너 갔고.



다음 날 아침, 숙소 근처 식당을 찾아 무떡(蘿蔔糕)과 밀크티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했다. 무와 쌀가루를 반죽해 구워낸 무떡은 대만의 대표적인 아침 메뉴 중 하나다. 전날 밤 고량주로 혹사당한 속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부드러워, 지친 속을 편안하게 달래주었다.



달달한 간장소스에 찍어먹으면 꿀맛



출근길 직장인들로 북적거리던 식당의 활기도 어느새 한산한 공기로 바뀌어 있었다. 수많은 평일 중 하루일 뿐인 그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천천히 아침을 즐겼다. 그러고 나니, 어제 계획이 무산된 뒤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힘을 빼자



둘째 날 오전은 별다른 미팅 없이 대만 게임쇼 2018의 현장을 자유롭게 관람했다. 전시장 곳곳에서 VR 게임들이 눈에 띄었는데, 흥미로웠던 건 대만의 홈그라운드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는 기기가 HTC 바이브 일색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큘러스 제품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고, 전체적인 전시 분위기 또한 우리가 익숙한 국내 행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날 느꼈던 아쉬움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말끔히 정리됐다. HTC의 본고장인 대만조차 시장의 논리가 이토록 유연하게 작동하고 있다면, 굳이 외국인인 우리가 특정 브랜드에 집착하며 매달릴 필요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얼어 죽을 꽌시는 무슨, 그냥 하던 거나 잘하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후부터는 다시 미팅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참관하러 온 여러 대표님이 부스에 들러 따뜻한 응원을 건네주었고, 대만을 비롯해 중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기업들과도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과도한 기대를 덜어내고 시장 조사를 겸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자, 오히려 미팅의 공기는 한결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흘러갔다.



한국에서 온 대표님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만남 가운데 ‘미디어 쿠보(Media Kubo)’라는 일본 업체와의 인연이 맺어졌다. 이들과의 만남은 귀국 후 실질적인 계약으로 발전했다. 우리는 이들과 협업해 중국의 ‘NOLO’라는 VR 디바이스에 맞춰 ‘버추얼 닌자’를 공급하게 되었다. 한국 기업인 우리가 대만에서 만난 일본 파트너와 손을 잡고 중국 비즈니스를 전개하게 되다니, 이 얼마나 묘하고도 글로벌한 조합인가 싶어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네트워킹의 밤



저녁에는 진흥원이 주최한 단체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이번 대만 게임쇼에 공동관으로 참여한 한국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여 숙소 근처의 삼겹살집에서 식사하는 자리였다. 기관이 주관하는 해외 행사에는 꼭 간담회를 겸한 회식 일정이 포함되는데, 메뉴는 대개 호불호가 없는 한식으로 정해지곤 한다.


낯선 타국에서 단체로 움직이다 보면 국내에서보다 유대감이 훨씬 빠르게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이라면 이런 회식 자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팁이다. 같은 업계 내에서도 나름의 경쟁을 뚫고 올라온 '엄선된 기업들'과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취기가 오를 즈음 술자리가 마무리되었고, 친구와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2차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대만은 생각보다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를 찾기 어려운 나라였다. 한참을 헤맨 끝에 간신히 불이 켜진 ‘금어일본요리(金魚日本料理)’라는 식당을 발견해 들어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차가운 사케를 한 잔 곁들였다.



회가 워낙 두껍다보니 씹는다기보단 뜯는 것에 가까운



어디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두툼하게 썰어낸 회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가게의 분위기나 메뉴 구성이 마치 일본 현지의 이자카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쯤 되니 대만은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중국보다는 일본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이 다시금 온몸으로 실감 났다.


그렇게 3일간의 대만 게임쇼 전시 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음 날 오전 일찍 짐을 싸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후일담



HTC와의 ‘꽌시’ 만들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대만 게임쇼가 끝나고 약 두 달 뒤, 우리는 현장에서 만난 일본 파트너와 손잡고 중국 VR 디바이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버추얼 닌자’의 현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제적인 준비가 뜻밖의 기회를 불러왔다. 한국에서 급작스럽게 성사된 샤오미(Xiaomi)와의 비즈니스 미팅에서 결정적인 ‘한 방’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국내 업체가 중국 시장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오직 우리만이 이미 최적화를 마친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속도가 샤오미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켰다.


그 결과, 2018년 5월 ‘버추얼 닌자’는 국내 VR 콘텐츠 중 최초로 샤오미를 통해 중국 시장에 정식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국내 VR 컨텐츠의 중국 '정식' 출시는 최초, 미 VR의 '미(mi)'는 샤오미의 그 미(米)



돌이켜보면 시장의 흐름 또한 묘했다. 당시 내가 그토록 매달리려 했던 HTC 바이브는 이후 오큘러스와의 점유율 경쟁에서 점차 밀려나더니,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의 위상이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마치 ‘미래시(未來視)’라도 작동한 것처럼, HTC와의 협업에 무리하게 힘을 쏟지 않고 유연하게 태세를 전환했던 결정이 결국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의외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약 한 달 뒤인 2월, 우리는 작년부터 예고되어 있던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또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음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 대감집 머슴의 깨달음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다음 주 부턴 다시 화 / 금요일에 정상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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