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9
세상에!
대만 애들 여기 다 모였나봐?
다음 날 아침, 카페인 충전을 위해 숙소 근처 85도씨 매장에 들러 그 유명하다는 대만 소금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대만 게임쇼 2018이 열리는 세계무역센터 앞은 아직 개장 전임에도 불구하고, 입장권을 사기 위해 늘어선 인파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구름 인파’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을 정도였다.
행사장 2층에 마련된 공동관 부스에 도착한 우리는 우리와 일정을 함께할 통역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사전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사실 해외 비즈니스에서 가장 높은 벽은 단연 ‘언어’다. 다행히 진흥원이 지원하는 공동관 사업은 기업마다 전담 통역사를 배정해주는 덕분에, 언어의 장벽을 걱정하기보다 미팅의 본질에 더 집중할 수 있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비즈니스 미팅에서 통역사의 역할은 단순히 언어를 치환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특히 B2B 행사처럼 기업당 주어진 시간이 30분 안팎으로 짧을 때는, 그 금쪽같은 시간 안에 회사 소개부터 실질적인 협상까지 마쳐야 하기에 통역사와의 '사전 호흡'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미팅 시작 전, 통역사와 짧게나마 오리엔테이션을 하며 이번 행사의 구체적인 목적과 반드시 전달해야 할 핵심 메시지를 공유했다. 이렇게 밑그림을 그려두면 통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지체나 오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노련한 통역사는 내 의중을 파악해 대화의 물꼬를 자연스럽게 터주었고, 덕분에 미팅은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매끄럽게 흘러갔다.
설령 본인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더라도(나는 아니었지만), 국적이 다양한 상대방의 모국어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다. 모국어가 주는 친밀함은 딱딱했던 비즈니스 테이블의 공기를 단숨에 부드럽게 바꿔놓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통역사는 단순한 메신저를 넘어, 대화의 온도를 조절하는 조율자이자 든든한 파트너였다.
뜻밖의 수확은 또 있었다. 현지에 거주하는 통역사가 미팅 사이사이 들려주는 대만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사회적 분위기 같은 생생한 정보들은 그 어떤 시장 보고서보다 값졌다. 가끔 관광객은 절대 알 수 없는 로컬 맛집이나 숨은 명소에 대한 정보까지 덤으로 얻을 때면, 이번 출장이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깊이 있는 견문록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오늘 내 모든 관심은 오직 한 가지에 쏠려 있었다. 온종일 다양한 기업들과의 미팅이 촘촘하게 예정되어 있었지만, 내 마음속 ‘진짜 목표’는 단 하나, HTC와의 접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진흥원의 도움으로 오후 미팅이 성사되었고, 나는 동행한 친구에게 다른 일정들을 맡긴 채 현장 분위기를 미리 살피기 위해 1층 B2C 전시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시장 분위기가 묘했다.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살려 활기찬 에너지가 뿜어져 나올 거라 기대하며 HTC 바이브 부스를 찾았지만, 인파로 북적이는 주변 게임 부스들과 달리 이곳은 의외로 차분하고 고요했다. 한참을 그 근처에 머물렀지만, 내가 기대했던 열기나 압도적인 에너지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후에 진행된 본 미팅 역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협업 제안에 대해 담당자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자사의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지원해 보라는 형식적인 안내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관계를 중시하는 중화권 비즈니스 문화를 염두에 두고 분위기를 띄우려 유쾌한 리액션까지 곁들였건만, 미팅은 끝까지 딱딱하고 사무적인 선을 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로 유도해 ‘꽌시’를 맺어보려던 나의 야심 찬 계획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미팅이 끝난 뒤, 허탈한 마음에 “대만 사람들 왜 이렇게 차갑냐”며 짜증 섞인 투정을 부리자 옆에 있던 통역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첫 만남부터 너무 많은 걸 기대하시면 안 되죠. 이곳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은 잠시 내려두시는 게 좋아요.”
그 말이 이상할 만큼 가슴에 깊게 박혔다. 내가 얼마나 내 방식대로만 넘겨짚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격식을 중시하고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태도, 그리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신중함. 어쩌면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다. 막연히 상상했던 중국식의 호탕하고 빠른 흐름과는 달리, 내가 마주한 대만인들은 훨씬 절제되고 신중했다. 어딘가 일본식 정중함과 닮아 있는 그들의 기류를 나는 미처 읽지 못했던 것이다.
첫날 일정을 마친 뒤에도 나의 ‘헛발질’은 멈추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대만은 여주(苦瓜) 요리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달걀 여주 볶음(鹹蛋苦瓜)’을 주문했다. 현지 음식을 제대로 경험해 보겠다는 부푼 기대는 그러나, 음식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예상보다 훨씬 강렬한 쓴맛이 입안을 장악하더니, 씹으면 씹을수록 그 기운은 더욱 짙게 퍼졌다.
입안에 들러붙은 쓴맛 탓에 다른 음식에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나오는 길, 아쉬운 마음에 숙소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우육면 컵라면인 ‘만한대찬(滿漢大餐)’과 58도짜리 ‘금문고량주(金門高粱酒)’ 한 병을 사 들고 숙소로 향했다.
에어비앤비 거실에 앉아 컵라면에 물을 붓고 고량주를 한 잔 따르며, 함께 온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한창 바쁜 시기에 정말 미안해요. 이번 대만행은 괜히 시간과 돈만 버리게 만든 것 같네.”
그는 짧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것도 다 경험이지.”
그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TV를 보며 컵라면을 비우고 독한 고량주를 삼켰다. 쓰고 독한 술기운만큼이나 속이 쓰린, 대만에서의 두 번째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편, '대만 타이베이 : 꽌시 대신 미래시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이번 주는 매일(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