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19
넌 너만의 지도를
만들어야지
두바이에서의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인 ‘NRP 월드와이드 글로벌 개척단’의 쇼케이스가 열리는 날이었다. 주최 측인 경기콘텐츠진흥원은 아랍에미리트 현지의 주요 기업 관계자들과 관련 협회 인사들을 대거 초청해, 우리가 비즈니스 협력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별도의 통역 지원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예전만큼 어깨가 무겁지 않았다. 바로 직전 여정이었던 영국 맨체스터에서 ‘메신저의 유창함보다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은 덕분이었다. 원어민처럼 프리토킹을 구사하진 못해도, 번역기를 적절히 활용하며 방문객들을 응대하는 내 모습은 제법 능숙했다. 프레젠테이션 역시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이곳 두바이 공항 벤치에 앉아 환승을 기다리며, 영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낯선 땅의 비즈니스맨들과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스스로가 퍽 대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번 두바이 행사의 성격은 콘텐츠 자체보다 시뮬레이터 중심의 VR 테마파크 사업에 훨씬 치우쳐 있었다. 순수 소프트웨어 개발사였던 우리 회사는 행사의 중심부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프레젠테이션 이후에는 방문객 응대보다 네트워킹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어차피 이번 아랍에미리트 여정의 실질적인 목표는 잠잠히 숨어 있는 ‘중동의 큰손’을 찾아내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행사장 안을 샅샅이 훑어봐도 이 땅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로컬 부자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적어도 어제 아부다비에서 보았던 이들처럼, 하얀 전통 의상인 ‘칸두라(Kandoora)’를 기품 있게 차려입은 사람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 복장은 전무했다.
행사장 곳곳을 누비며 관계자들에게 물어본 끝에 흥미로우면서도 허탈한 진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이곳의 진짜 부자들은 이런 행사에 직접 발걸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인도나 파키스탄 출신의 유능한 대행인을 전면에 내세우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바로 그 ‘대리인’들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순간, 부풀었던 기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확 사그라들었다. 심지어 어떤 대행인은 우리의 콘텐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뜬금없이 “여기 전시된 VR 기기들은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행사의 본질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질문에 김이 샌 나는, 그냥 두바이몰에 가서 잘 찾아보라는 냉랭한 대답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행사 다음 날, 밤 비행기로 출국하기 전까지 꿀맛 같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숙소를 체크아웃한 뒤, 나는 홀로 시내를 거닐며 여유롭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른 대표님들이 사막 투어에 함께 가자고 권했지만, 워낙 익스트림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편도 아닌 데다 2주간 이어진 강행군 탓에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아 정중히 사양했다.
오전에는 우버를 타고 그해 1월에 막 개관한 ‘두바이 프레임(Dubai Frame)’으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거대한 황금빛 액자 모양을 한 이 전망대에도 역시나 ‘세계에서 가장 큰 액자’라는 수식어가 당당히 붙어 있었다. 아찔한 높이의 투명한 유리 바닥 위를 조심스레 걸으며 발아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짜릿함 그 자체였다. 이때 받은 강렬한 인상은 훗날 우리 서비스 ‘갤럭시티’의 대표 콘텐츠 중 하나인 ‘고공 파이프 건너기’를 기획하는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오후에는 지하철과 트램을 갈아타며 인공섬 ‘팜 주메이라’로 이동했다. 그곳에 위치한 고든 램지의 레스토랑 ‘브래드 스트리트 키친(Bread Street Kitchen)’에서 그의 시그니처 메뉴인 ‘비프 웰링턴’을 주문했다. 솔직히 미각을 뒤흔들 만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워낙 유명한 요리이다 보니 그 명성이 주는 ‘기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돌이켜보니 맨체스터의 제이미 올리버를 시작으로 두바이의 고든 램지까지, 이번 여정은 본의 아니게 영국 스타 셰프들의 맛집 탐방기가 된 셈이었다.
어둠이 내린 저녁, 나는 다시 두바이를 상징하는 두바이몰로 돌아가 마지막 분수쇼를 감상했다. 거대한 물줄기가 감미로운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화려한 장관을 마음속 깊이 담은 뒤, 숙소에 맡겨둔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의 뜨거웠던 2개국 글로벌 개척 투어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새로운 전략 로드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옛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아랍에미리트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의 터전에 ‘두바이’ 같은 대도시가 들어설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누군가는 불가능해 보이는 가능성을 꿈꿨고, 그 믿음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사막 한복판에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를 독점하며 우뚝 선 이 도시는, 결국 누군가의 치열한 상상력과 확신이 빚어낸 결정체였다.
그 경험은 스타트업이 걸어가는 여정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스타트업이란 이미 닦인 길을 따라가거나 단순히 눈앞의 이익을 쫓는 일이 아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으로 그려내고, 그 막막한 지도 위에 스스로 길을 내는 과정이다. 두바이에 머무는 내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건, 누군가의 신념 위에 세워진 비현실적인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경이로운 풍경 앞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한 각오를 다시금 마음 깊이 새겼다.
두바이 출장 이후, 나는 단순히 콘텐츠를 제작하는 수준을 넘어 응용 기술을 깊이 연구하고 회사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약 반 년 뒤, 본사를 경기도에서 대구로 이전하며 R&D 중심의 기업으로 체질을 완전히 전환했다. 이 과감한 선택은 훗날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을 때, 수많은 제작사가 위기를 맞이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게 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그렇게 ‘맘모식스 시즌 3’의 막이 올랐다.
물론, 그것은 조금 더 먼 훗날의 이야기다. 두바이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남짓 흐른 시점, 우리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편, '독일 쾰른 :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넣어봤어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