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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istan Nov 21. 2020

01. 사냥이 무서운 성난 호랑이 2

팀장에 관하여

0.

호랑이 팀장이 부임하고 3개월이 지났다. (체감상 지난 글을 발행하고 3개월이 지난 느낌이기도 하다) 경력직 입사라면 수습기간이 끝나는 시기겠지만, 계열사 이동이기도 하고 직책 간부라서 그런 건 없는 듯했다. 사실 몇몇 유명한 IT기업을 제외하고 수습기간이 유의미하게 활용되는 사례를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참 아쉬웠다. 아직도 참 아쉽다. 


어딜 가나 동일한 그 3개월의 기간 동안 대부분 근본이 들통난다. 호랑이 팀장도 그렇고 뱀 대리도 매한가지였다. 군대 인사장교도 그랬고, 신앙이 불타오르던 교회 리더도 그랬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고,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정보에 접근 가능해서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있을 것 같지만, 3개월만 같이 일해보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 판가름 난다. 그 기간 동안 호랑이 팀장도 충분히 본인의 실력 없음을 증명했고 팀원들의 신뢰를 넉넉히 잃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너무 단호하게 표현한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명시적으로 그랬다. 주요 실패 사례와 이에 따른 연말 평가를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호랑이굴 회의를 들 수 있다. 호랑이굴 회의란 참모 4명을 불시에 불러서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하는 회의인데, 팀원들은 이 회의를 호랑이 같은 팀장이 매번 소집하는 회의라서 이렇게 부르기도 했지만, 사실 호랑이굴 회의 내용의 결과는 오직 호랑이굴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한마디로 의미 없는 회의라는 뜻이다) 왜냐면 이 회의 결론과 상관없이 본부장, 대표 보고를 하는 시점에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호랑이가 보고를 했기 때문에 호랑이굴에서 내린 결론은 대부분 의미가 없었다. 신기한 건 그리고 호랑이굴 회의 결과와 다른 내용으로 보고한 뒤에도 호랑이는 호랑이굴 회의를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때의 분위기가 어땠고, 보고하기 직전 다른 팀장의 보고로 인해 회의실 온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하며 정당성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는 어떤 면에서 소통왕이었다.


소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자기소개 글이나 행사는 역설적으로 본인 혹은 해당 조직이 정말 소통이 안 되는 구나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이다.


2.

구체적으로 호랑이굴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저 멀리 본부장 혹은 대표 방에서 굉장히 빠른 걸음소리가 Sound In  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친놈이 구두 신고 사무실에 뛰어다니나?' 하며 고개를 그쪽 방향으로 돌리면 갑자기, 내 시야에 그놈의 몰스킨 다이어리가 Frame In 한다. 그리고 능숙하게 파버카스텔 펜을 빼서 손짓으로 너, 너, 너, 참모를 소집하며 호랑이 팀장이 Frame Out 한다. 보통 쥐 과장과 강아지 과장, 원숭이 차장과 뱀 대리가 디폴트로 포함되고 사안에 따라 담당자들이 추가될 수도 있다. 회의 시작은 보통 호랑이 팀장이 방금 누군가의 방에서 떨어진 탑 다운 과제를 제시하면 강아지 과장이 틀에 박혀 뻔하디 뻔한 의견을 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서는 쥐 과장은 실현 불가능한 창의적인 의견으로 반박하고, 원숭이 차장은 마치 두 이야기의 절충안인 것처럼 워딩만 워싱해서 팀장님만 바라보며 남들이 했던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뱀 대리는 리액션을 한다. 


구체적인 대화를 통해 이 회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그만큼 중요하다)

다음은 회사 이니셜을 딴 브랜드 캠페인을 진행해보면 어떠냐는 본부장님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대한 회의가 진행된다고 가정하며 엮은 대화이다. (편의상 이 회사의 이름은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자)


"동물의 왕국" 이니셜 마케팅 대화


호랑이: 본부장님이 또 회사 이름의 이니셜을 딴 캠페인 얘기를 했다. 이제는 뭔가 구체적인 안으로 보고를 해야 될 것 같은데 뭐 아이디어 없냐? (3개월이 지나서 어색할 수 있겠으나, 출근 다음날부터 반말하기 시작했다)


강아지: 현대카드 이니셜 카드를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이벤트를 이니셜로 묶어서, 예를 들면 '동- 동글동글 캠페인, 물- 물처럼 깨끗하게 캠페인, 의- 의사 선생님들 힘내세요 캠페인'  뭐 이렇게 Approach 가능하지 않을까요?


쥐: 구린데요? 그놈의 현대카드는 현대카드가 하니까 가능한 거고. 동, 물 때쯤 하고, 뒤로 가면 흐지부지되서 다음 꺼는 그냥 '우왕 굿 캠페인' 이 찌랄 하면서 끝낼걸요? 그냥 내년 연간 캠페인 수립 때 고려해보겠다고 본부장님 한테 말하고 뭉개면 까먹을 거예요.


원숭이: 강아지 대리 얘기한 거에 조금 Ideation 더해서 대행사에 내년 캠페인 전략 기획서 받아보죠 


뱀: 오 좋아요! 저도 Brainstorming 해서 아이디어 더해볼게요! 여보세요? (하고 전화하러 나감)


회의가 끝나고 우리의 대행사는 어김없이 믿기지 않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각각의 이니셜로 시작하는 기가 막힌 다섯 단어를 뽑아내서 키워드 마케팅 기획서 완성해내고, 호랑이 팀장은 마치 본인이 기획한 것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본부장실로 들어간다.


흔한 마케팅팀 풍경 (인턴을 팀장으로 교체 가능)


잠시 후...


본부장실에서 나와 다시 소집한 호랑이굴 회의에서는 좀 전에 같이 본 그 기획서에서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새로운 문장들을 듣게 된다. 

추상적인 브랜드 마케팅이 아닌 세일즈 마케팅으로의 접근을 해서...

실질적인 매출이 발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거기에 교육 콘텐츠를 적극 활용해서...

대관 사업형태로의 접근이 시작이 될 거고......

지금 성급하게 한다기보다 Deep 하게 고민해서 내년부터 체계적으로 시작한다.....


잠시 우리가 무슨 회의를 하고 있는 건지 정신이 혼미해질 때 즈음에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호랑이 팀장이 설명한다. 


호랑이: 내가 보고하기 직전 운영팀장이 보고하며 방안에 기류가 달라졌다. 지금은 내가 온 지 3개월 정도 지난 허니문 기간이라 본부장의 키워드로 시간을 좀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 이 캠페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곧 있으면 다가올 성수기를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화제를 돌렸고....


쥐 과장: '아 씨발. 또 저 지랄...' (속마음)


뭐 이런 식이라는 거다. 

이렇게 호랑이 굴이라는 플랫폼을 활용해서 3개월 동안 그의 실력 없음을 입증했다. 초반에는 일정 부분 이런 대처가 나에게도 유효했음을 일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고, 시간이 지나며 반복되는 이런 결과는 모든 팀원들로부터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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