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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Oct 13. 2021

제주일기 두번째 이야기

월정리, 그리고 평대리


제주도에 온 지 9일째가 되어간다. 지민은 월정리에 있다.



화요일, 수요일은 n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태풍을 뚫고 나를 보러 날아왔다.

몰아치는 비를 간신히 피해 동문 시장에 들어선 우리. 1월에 혼자 왔던 동문시장에 누군가와 같이 오는 기분은 조금은 이상하고. 마치 제주도민이 된 기분이다. n은 캐리어를 끌고 있는데 나는 가방 하나 들고 있다는 그런 사실이.



n은 태풍 바비와 함께 왔고 바비와 함께 떠났다. 월정리로 가는 버스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며 버스를 타는데 집으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월정리는 이렇게 나에게 낯을 풀어간다.



더욱 심해지는 코로나로 인해 소낭에서는 파티가 당분간 없어진다. 소낭은 잠시 조용해진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

세상은 온통 파랗다. 팽팽하던 세상의 끈들은 느슨해졌고, 그 느슨함 속에서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허우적대고 있다.



사실은 아직도 제주도에 있는 게 꿈을 꾸는 것 같다. 커다란 어항 속을 가만히 부유하고 있는 기분이다.

제주의 공기는 습하다. 제주는 커다란 어항이다. 어항 속에서 아가미를 잃은 나는 천천히 떠다니고 있다.

침대에서 눈을 뜨기 전 이곳이 어디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뇐다. 이곳은 기숙사 우리 방이 아니라 월정리의 소낭이라고.



저녁 8시, 1호점 로비는 조용해졌다. 간간히 몇몇 손님들만이 드실 주류를 가지고 오신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야옹이. 10시 50분에 로비가 마감되면 그날의 하루 역시 끝이 난다.



밤의 월정리는 미로같다. 분명 이 곳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어제 나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열두살의 우리와 스물두살의 우리. 너가 있기에 존재하는 나와 내가 있기에 존재하는 너. 너와 나라는 두 단어의 만남이 주는 묘한 안정감. 그 안정감 속에서 우리는 더욱 굳건해지고.


스물두해 동안 우리 각자가 형성해 온 관계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사랑해.






8월 29일. 두번째 휴무날이 찾아왔다. 하루 일하면 하루 휴무, 이틀 일하면 이틀 휴무가 찾아온다고 보면 된다.

오름투어로 하루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뒤늦게 시작된 휴무날. 스텝 친구와 함께 평대리를 가기로 했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검은 머리가 이렇게 긴 적은 또 오랜만이다. 이번 머리카락에게는 잘해줘야 겠다.


월정리 근처에 있는 평대리로 왔다. 월정리 정류장에서 201번을 타고 평대리 서동역에 내리면 평대리 해수욕장에 갈 수 있다. 평대리의 바다는 맑다. 다른 해수욕장과 다르게 유난히도 사람이 없었다.


제주의 하늘은 뜨겁다. 습한데 뜨겁기까지하다. 계속해서 서울과 광주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난다. 아이들은 나를 걱정하고 나는 아이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다시 건강하게 만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걱정하지.






레이식당을 가기 전 카페 '아도록'에서 한라봉스무디를 마신다. 아이들은 차가운 거 많이 먹으면 돌생긴다고 매일 나에게 뭐라고 하곤 했지. 지민에게 즉흥과 아이스를 빼면 지민이 아니다.



카페 '마니'에서 글을 쓰는 중이다. '마니'에서는 평대리의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평대리의 하늘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제주에서는 그 일들이 모두 속도를 잃은 기분이다. 어찌되었건 지민이 제주에 온지 9일째가 되었고, 제주의 파도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도망치듯 제주로 향했고, 나는 제주에 얼마나 더 머물게 될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제주에는 또다시 태풍이 찾아온다. 이번엔 태풍을 타고 누가 지민을 만나러 올까.





돌담에 앉아 사진을 많이 찍었다. 무더위에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d, 기억나? 기숙사 침대에 누워 내가 박은정의 악력을 읊던 그날을. 불이란 불은 모두 꺼졌고 숨을 죽이고 나의 이야기를 듣던 네가 떠올라.



꽃병의 물이 썩어 간다 나는 누웠다 창밖에선 날카로운 감탄사들이 들려온다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퍼지고 개들은 더위 속에서 조금씩 미쳐 간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 폭염 아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노래는 한 곡 반복된다 주먹을 쥐면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다 유년의 침울한 내가 옆에 눕는다 넌 변한 게 없구나 내 오른뺨을 찰싹 때리는 소리, 나의 슬픔은 맞아도 싸다 눈물이 귓속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 방은 완전한 어둠이다 인중에 땀이 맺힌다 눈물이 땀과 뒤섞인다 이물질은 이제 무엇으로 연동되나 나는 걷고 있었다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과 함께 나는 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희미하게 방 안을 맴도는 기억이 있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며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등을 돌리면 엄마가 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있다 엄마는 반복되고 있었다 안방에도 거실에도 부엌에도 엄마, 머지않아 우린 다 사라질 거야 오후가 저물도록 새장의 새는 노래하지 않는다 나는 어둔 거실에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그것은 노래도 한숨도 아닌 어떤 낯섦 같은 것이었는데, 그 낯섦 속에는 막 쓰기 시작한 잔혹사가 도사리고 있었다 어떤 비유도 어울리지 않는, 그저 멈춤, 다가가기 전의 망설임,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의 불안감, 다시 주먹을 쥔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한 기억, 손 안의 새가 날아간다 손 안의 야생이 달아난다 너는 너무 감상적이야 유년의 내가 왼뺨을 때렸다 그것이 어떤 문장인지 나는 모른다 그저 네네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 이상하고 서글픈 일이 나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때 노래 한 구절이 들려왔다 끝도 없이 반복되던 노랫말이 들렸다 주먹을 다시 펴 본다 짓이겨진 새가 노래한다 문드러진 꽃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박은정/ 악력(握力)




이 이상하고 서글픈 일은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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