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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Oct 13. 2021

제주일기 세번째 이야기

월정리의 새벽

제주에 온 지 11일째 되는 날.

침대에서 잠시 뒤척였다. 역시 낯선 곳에서의 잠은 쉽지 않다.



친구가 이사를 했다. 분명 이삿짐을 같이 옮겨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제주에 와 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월정리에 와서 10일의 밤을 보았다는 소리. 오늘도 소낭은 조용하다.



월정리 해변 근처에 있는 '오늘도 화창'이라는 카페에 왔다. 당근 케잌은 역시 투썸의 케잌을 이길 수 없다. 투썸을 떠난지 몇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투썸을 찾아간다. 스물 한살에 시작했던 투썸.


이렇게 기억은 스물한살 때를 향해 흘러가기 시작하고.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스물 한살의 지민은 8월에 혼자 곳곳을 다녔더랜다. 안국을, 뚝섬유원지를, 곳곳을 다인의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다. 걷다가 힘들면 카페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켰으며, 눈 앞에 보이는 풍경들을 향해 정처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안국을 간 날은 안국역에서 무악재까지 걸어갔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겠다는 이상한 오기와 함께 안국에서 삼청동으로, 삼청동에서 경복궁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핸드폰 배터리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음악조차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터널을 걷고, 육교를 걷고, 시장을 걸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걷게 만든 것일까. 걸을 때의 나는 수만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숨을 쉬는 것, 걷는 것 그 행동 하나 하나에 감정을 쓰는 사람. 그러므로 걷는다는 행위 역시 나에게는 감정을 쓰는 행위.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내 세상에서 나만의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불변의 견고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무엇이든 금이 가고 깨어지게 되어있다. 어쨌든 그 파편들로부터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가냐가 중요하겠지. 나는 지금 새롭게 만들어지는 중이다.






'오늘도 화창'내부. 디자인이 참 마음에 든다.


회상은 잠시 멈추고 다시 여긴 제주다. 무더운 안국을 걷던 지민은 현재 월정리의 카페에 앉아 있다.



군대에 있는 k가 책을 사주었다.

'k가 제주에 있는 지민에게'.


k가 보낸 '항구의 사랑'은 바다를 건너 나에게로 왔다. 책을 받는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선물이다. 책과 함께 그 친구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같이 담겨왔다.




제주의 시간은 너무나도 이상해서, 느리면서 동시에 빠르기 때문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보면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다. 침대 속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오랜 시간 동안 숨을 토해내어도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기도 하다.


현재 시간은 오후 4시 48분. 다시 나는 과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






월정리의 달



d와 여의나루에서 기숙사까지 걸어왔던 날이 있다. 그날 새벽의 우리는 자전거를 끌고 우리가 만나왔던 4년의 시간보다 더 많은 비밀이야기를 나누며 키득였다. 자전거를 끌다가 다리가 아프면 걸었다. 마포대교를 건넜으며 불광천을 걸었다. 그때 기숙사에 도착했던 시간이 바로 새벽 4시반.


나의 많은 비밀들은 대부분 새벽에 만들어진다.



혜화에 있는 n의 집에서 새벽까지 밤을 새다 갑자기 뛰쳐나온 적이 있다. 새벽 네시, 다섯시경 나누미에서 정신없이 떡볶이를 먹었다. 졸려하는 나를 충무로까지 데려다주며 n은 꼭 녹번에서 내리라고 진심으로 당부했지.



n과 함께 남산타워를 갔다가 집에가지 말자고 결심한 새벽이 있다. 우리는 막차를 보내고 충무로까지 걸어가 하얀집을 갔다. 낄낄대며 그렇게 첫 타투를 예약해버리고. 내 오른팔에는 노란색 별자리가 새겨졌다.

h의 집에서 y와 다같이 눈을 감았던 새벽이 있다. 그런 새벽이 있었다.


전화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나를 걱정한다. 아이들의 걱정과 우려, 사랑을 먹고 자란 나는 씩씩하게 제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내 삶의 원동력이다. 아이들의 조건없는 사랑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다시 제주.


서울에서 제주도 월정리 밭으로 옮겨 심어진 지민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월정리 햇살과 달빛을 먹으며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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