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리에서의 첫 이별
오늘은 근무날. 스텝언니가 떠난 날이다.
언니는 내가 준 동백핀을 체크 원피스에 찔러넣고 떠났다. 제주에 와서 떠나보낸 첫 사람이다.
가족과도 스킨십을 잘 하지 않던 내가 스텝언니에게 안아달라고 한다. 그리곤 말하지. 언니, 절 잊지 말아요.
내일은 드디어 개강이고, 아직 나는 개강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개강이라니, 나는 아직도 7월 초에 머물러 있다. 내일은 혼자 월정리에 있는 카페에서 조용히 개강 파티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날의 바다를 다시 찍겠지. 살면서 이렇게 자주 바다를 본 적이 있었을까. 내륙에서만 살아온 나는 아직도 바다를 볼 때마다 낯설고 새롭다. 나이가 들어 다시 월정리에 오면 어떤 생각들이 나에게 몰려올까. 10년 후 서른 두살의 지민은 스물 두살의 지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제주도에서 지민이 제일 잘하는 것은 회상하기.
여름밤의 무더운 습기를 사랑했던 스무살의 지민을 떠올린다. 무더운 한여름밤에서는 모두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스무살의 여름 중 가장 강렬하게 남는 기억은 여름의 끝자락, 회색 맨투맨을 입고 시험을 보러 학교에 다녀온 날. 여름과 가을의 중간, 그래서 그런지 더위는 떠나지 않고 공기 중에 떠다녔고, 땀을 조금 흘렸다. 녹번역에 들어설 때 나에게 들이닥쳤던 수많은 감정의 입자들. 그렇게 나는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d와 드디어 룸메이트가 됐을 때, 불을 꺼놓고 각자의 침대에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속삭였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지. 사랑 이야기는 언제 해도 질리지 않아. 우리는 매일 매순간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사랑이란 단어를 글자로 옮기는 순간, 떠오르는 동기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사랑을 묻고 걱정한다. 스무살의 봄과 여름, 서로의 사랑 이야기를 하며 키득대던 순간들이 몰려오고.
y와 매일 밤 사랑 이야기를 하곤 했다. 꿈꿔왔던 순간들에 대해서. y와 하는 전화는 끝을 알 수 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대화 하나를 끝냈다 싶으면 또 다른 대화가 시작된다. 우리의 대화에는 시작과 끝이 없고, 서로는 너무나도 그것을 잘 안다. 우리는 토마토 주스 하나로도 한 시간을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
월정리에서 나는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이미 나는 월정리의 해변을 그리워하게 됐고.
남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기억의 잔재를 쓸어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모두 기억할게.
네가 말한 모든 것들을 나는 기억할거야. 너와 관련된 기억들이니깐.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을 모조리 간직하고, 그들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러한 기억들의 시작엔 항상 장소가 존재하지. 기숙사 옆 조그만 동산을, 혜화를.
혜화를 사랑한다. 혜화는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장소다. 혜화의 모든 공간들을 사랑한다. 낙산공원을, 혜화역 4번출구를, 벽화마을을, 마로니에 공원을. 혜화의 아침과 낮, 밤과 새벽. 모든 시간대를 사랑한다.
어제 본 월정리의 해변에는 미역들이 떠내려 왔다. 거대한 미역국 같아. 미역국에 동동 떠있는 우리들. 너희들에게 주기 위해 나는 열심히 기념품을 사모으고 있다.
제주에 오자마자 예약했던 게스트하우스들을 모조리 취소했다. 오늘은 낯가림을 취소하고 받은 환불금으로 컨버스를 산다. 서울에 도착하면 방에는 택배 상자가 쌓여 있겠지. 계획했던 것들이 어그러짐에 있어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 또한 새로운 일들로 채워지겠지 생각해보기로 한다.
제주에 온지 12일째고, d와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을 내 기숙사로 돌아가려면 열여덟 밤이 남아있다. 지금 나는 소낭의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러 올 게스트들을 기다리는 중. 월정리에는 또다시 태풍이 온다.
요즘 아이들에게 전화할 때마다 사랑을 외친다. 아이들의 답은 정말 거짓말같게도 모두 똑같다.
바보야, 그걸 이제 알았어?
너희들을 너무 너무 사랑해. 너희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매일 밤 나의 일생을 담보로 너희의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