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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Oct 13. 2021

제주일기 다섯번째 이야기

월정리의 개강


제주에 온 지 열세번째날. 



개강을 했다. 월정리에는 태풍이 찾아왔다. 


혼자 카페 '무늬'에 왔다. 이러다 월정리의 모든 카페를 접수하고 서울에 돌아갈 것만 같다. 카페 '무늬'는 반미 샌드위치를 파는 곳. 창가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월정리의 갈대 바라보기. 반미 샌드위치에 아이스아메리카노.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어가지만 강의는 하나도 듣지 않기. 


이번 학기는 15학점만 듣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오늘 일어나자 한 일은 도시사회학 수강 철회하기. 오늘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끝냈다. 분명 나는 국문과생인데 시간표에는 온통 다른 수업밖에 없다. 도대체 작년 1학기의 지민은 왜 경제학원론을 신청한 걸까. 세기의 의문이다. 어쨌든 재수강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절망.


경제학원론 시험 전날 기숙사 자율회실에서 밤을 새서 경제학원론을 공부했다. 분명 나는 밤을 새서 공부했는데 공부했다고도 말하기 부끄러운 학점이 나왔다. 후회는 없고. 평생 경제랑 친해질 생각은 없기 때문에.


카페 '무늬'


여름방학이 싫다. 분명 나는 여름에 태어났고 추위보다는 더위를 더 잘참고 여름밤의 습기가 좋고 여름에 먹는 아이스크림들이 좋은 사람인데, 그런데 여름방학은 싫다. 나는 여름방학이 싫다. 구 월, 여름방학이 드디어 끝이 났다. 이번 여름방학 역시 겨우 견뎌냈다.



태어난 계절은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나는 칠 월에 태어났고 더위를 잘 참는데 여름의 지민은 한없이 약해진다. 한 여름에 말라죽어가는 벼보다 더 약해져서 한없이 구부러지다 못해 쪼그라든다. 







내가 앉아있는 창가의 화분들, 기숙사에 있는 우리 식물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선인장을 선물로 받았다. 이상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받은 선인장은 금세 말라죽었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받은 선인장은 아직 살아있다. 무럭 무럭 자라서 광주 내 책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 키가 커졌다.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는데 그 선인장은 살아남았다. 아빠가 물을 주는 것을 자꾸만 깜박해서 내가 광주에 갈 때만 물을 먹는데도 살아남았다. 


매일 꾸는 악몽은 더이상 악몽이 아니다. 매일 꾸는 꿈은 더이상 꿈이 아니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내 몸은 악몽이 끝남과 동시에 일어난다. 여섯시 반, 일곱 시 반, 여덟시 반. 이렇게.







어제 마감을 끝내고 맥주를 마시러 해변으로 나갔는데 바람이 너무 세게 불었다. 짠내와 함께 파도가 몰아치는데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휩쓸릴 것만 같았다. 어깨의 고래가 들썩거림을 느낀다. 제주도에 함께 내려온 어깨의 고래는 잘 지내고 있다. 



우중충한 월정리



무언가에 한번 빠지면 정도를 모르고 계속해서 하게 된다. 


노란색 게자리,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 능소화, 혹등고래. 첫번째 타투를 받을 때 타투이스트 분에게 영원히 저랑 함께 있는 건가요 물어본 적이 있다. 타투이스트 분은 죽을 때 묻혀 가루가 되면 그때 사라지겠죠 라고 답했고.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 죽어도 이 아이들로 인해 신원을 확인받을 수 있을거야. 타투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한다.







분리되지 않는 허공이 얼룩점들을 끌어 모아 분리되어지는 슬픔 쪽으로 조금씩 흩뿌린다는 뜻 슬픔은 양육되어진다 가만히 골방에 빚쟁이처럼 웅크린 슬픔을 보라

최세라/ 슬픔은 양육되어진다 중에서



내 슬픔은 끝을 모르고 양육되어진다. 목적을 알 수 없어 정처 없이 떠돌다 나에게 달라붙은 슬픔은 양육되어진다. 나는 커다란 독을 두고 슬픔을 키운다. 슬픔은 끝을 모르고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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