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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0일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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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y 18. 2022

실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

내가 나를 다시 키우는 100일의 휴가 - 2일 차

일기장, 책, 물, 군고구마를 챙겨 지하철에 올랐다. 집에서 도착까지 1시간이 훌쩍 넘는 곳. 100일 휴가 둘째 날 목적지는 일산호수공원이다. 워낙 나무와 물이 있는 곳에서의 걷기를 좋아해 올림픽공원, 선유도공원과 함께 꼬꼬마 시절부터 자주 찾았던 곳이다. 얼마 만에 가는 거지? 마치 그리운 옛 친구 보러 가듯 살짝 설레며 자리에 앉아 책을 보던 중 갑자기 훅 밀려드는 피로감. 아직 호수공원 도착은커녕 마두역까지도 몇 정거장이 남았는데 여기서 벌써 지쳐버린다고? 이런 저질체력이라니... 너 진짜! 순간 나 자신을 원망하려던 나를 알아차린 나는 냉큼 책을 덮고 빗소리를 플레이한 뒤 눈을 감았다. 15분쯤 지났을까. 순간 방전된 배터리가 약간 충전된 느낌.


내가 나에 대해 잘 잊는 사실 하나. 나는 갑상선기능저하증을 앓고 있는 자가면역질환자라는 것. 이 질환의 특징은 피로감과 무기력감이다. 진단을 받고 몇 해동안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경계 상태에 있었지만 수치가 떨어져 약을 먹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다. 다행인 것은 중간에 약 용량을 늘렸다가 수치가 다소 좋아져 용량을 줄인 것. 무튼 피로감, 무기력감, 졸음이 밀려드는 이 질환의 특징과 내 몸의 상태를 간과하고 그저 매일 아침 눈뜨면 복용해야 하는 약만 습관적으로 삼켰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몸에 미안해진다. 계속 피곤하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몸을 외면하기만 했으니. 아마 내가 지친 내 마음을 돌보는 100일의 휴가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마음만큼 내 몸도 많이 지쳤음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는달까.


2022.5.15 일산호수공원
5월의 꽃 '작약'


오랜만에 찾은 호수공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20%쯤 충전된 것 같았던 내 몸의 배터리는 마두역에 도착해 공원으로 향하면서 신기하게도 100% 완충된 느낌이었다. 스무 살의 내가 폴짝폴짝 뛰어다녔던 그곳은 반짝이는 윤슬, 푸른 하늘빛, 바람 모든 게 싱그러운 5월 그 자체였다. 고갈된 나의 에너지를 자연에서 충전하겠다 마음먹고 이틀. 자연 속에서 숨 쉴 수 있음에 주책맞게 급 코끝이 찡해졌다.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 했던가. 그래 불혹이 넘었으니 내 나이도 아주 적은 나이는 아니다. 천천히 산책을 하는데 예뻐하는 다알리아, 수국, 작약, 조팝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작약은 어디서 보나 했는데 호수공원에서 다 보았다. 동글동글 작약은 뭐랄까 약간 복불복이다. 더러 동그란 몽우리 상태 그대로 시들어 버리기도 하니까. 활짝 피면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꽃이 몽우리 상태에서 성장을 멈추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꽃은 다 귀하다. 사람이 모두 꽃이고 또한 모두 귀하듯. 글을 쓰면서 꽃을 함께 만졌던 시절, 몽우리에서 거짓말처럼 활짝 피어나고 이내 시들어가던 꽃들을 수없이 보면서 늘 사람과 다름없구나 생각했었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 나는 모든 시들어가는 꽃을 더 사랑했다.


넓은 호수공원을 거의 한 바퀴 차분히 걷고 벤치에 앉아 일기장 폈다. 감사할 게 많았다. 천천히 써 내려갔다. 그리고 이어진 한 문장.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왜 이렇게 무너지냐고 왜 이렇게 더 해내지 못하냐고 늘 나를 야단치고 비난하기 바빴지만 실은 심연의 한가운데에 있었을 때조차도 그 안에서 머무르고자 한 적 없음을. 세상이 전복되는 것만 같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다음을 생각하며 기어이 일어났음을. 내가 나를 몰라줬을 뿐 나는 한 번도 나를 완전히 포기한 적이 없음을. 충분히 노력했고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음을. 그 사실을 내가 몰라주면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내가 몰라주는데 타인이 알아주는 건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내 편이 되어주며 나 또한 누구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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