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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plica Oct 30. 2020

예민한 사람이 행복해질 확률

당신과 나의 행복이 어려운 이유




지면을 빌어 고백하자면 나는 꽤 자주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뭐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고 물을 수도 있으니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별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새벽녘이 꽤나 자주 있다. 그런 내가 우울증 치료제가 필요한 병리학적 환자냐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남들 보기에 절대적인 동정을 살만큼 불행 자랑 대회 챔피언 출신이냐면 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주 평범하고 잔잔하며 특이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고요한 삼십 대의 삶. 아니 누군가에겐 되려 그 정도면 충분히 충만하고 심지어 보기 좋은 삶이라는 면박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나는 여태껏 주어진 인생 스테이지를 충실하고 성실하게 밟아왔다. 노력 대비 운이 너무 나빴다거나 선천적으로 건강에 큰 핸디캡이 있다거나 가족이나 주위 큰 불행의 잔파도가 나의 일상을 잠식하는 그런 인생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남들 부러움을 살 만큼의 성공, 짜릿하고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적어도 남은 삶이 꽤 자주 버겁고 살아갈 의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으면 잘 모르겠을 만큼의 '별 일'은 없단 뜻이다. 자랑처럼 어디 꺼내 둘 모양새도 아닌 생각인지라 마음속에만 눌러 담아둔 이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활자로 적는 이유는 어느 날 문득 든 이 생각 때문이다.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누가 행복해?


내 머리맡 사전의 ‘살고 싶지 않다’는 고로 ‘죽고 싶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는 게 너무 힘드니 이제 그만하고 싶다의 의미가 아닌 왜 살아야 하는지 충분한 명분을 찾기 어렵다에 가깝다. 더 솔직히는 스스로 만족할 만큼 행복한 나에 도달하고 그런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현실 자각에서 오는 무력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찬찬히 첫 단락부터 이 글을 읽은 이들 중에는 그 정도 가지고 삶의 무게를 논하냐는 배부른 소리에 창을 꺼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인데 바로 그 포인트다.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은 발달된 오감과 세분화된 생각의 과정들을 응당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한다. 주위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누구보다 재빨리 처리해 주변을 다시금 균형을 상태를 맞추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쓴다. 모든 사회화 과정을 차례대로 밟아 삼십 대쯤 도착하면 이들 대부분 자기 기준이 꽤 높은 사람들로 성장했을 확률이 높다. 수많은 데이터와 경험이 쌓이는 과정에서 1그람씩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했다면 그 총합은 결국 높고 고귀한, 그래서 너무 빡센 자기 기준이 된다. 그 높은 기준을 채우고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꽤 큰 노력과 고충들이 수반되는데 그 결과값은 겸손하게도 ‘평범한 삶'이란 소박한 단어로 눙쳐진다. 내가 설정해둔 행복의 기준값이 이미 꽤 높고 실패에 있어서는 유독 박하고 유연하지 못하다. 행복한 순간에도 그 감정을 다 소화하기도 전에 또 다른 자극이 몰려오고 자주 요동치는 마음의 기복에 쉽게 흔들린다. 실은 이 원동력으로 여태껏 삶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기준과 평균값도 함께 올라가는 어른의 세계에서 매번 동력이 넘칠 수는 없는 노릇. 하여 때론 무력하고 때론 좌절한다. 먹어가는 나잇값에 부끄럽지 않게 어떤 발전이라도 일궈내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자각을 하기도, 실은 세상에 나의 노력과 진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꽤 많다는 나름의 진실에 닿기도 한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 중에 작은 일에도 디테일을 파며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누구도 요구하거나 기대한 적 없는 과도한 완벽주의는 빠르게 바뀌고 보다 가벼워진 요즘 세상에 상처 나고 깨지기 쉽다. 






때로 우리 머리맡엔 온갖 부정적인 상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다양한 사이즈의 걱정거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밤이 있다. 이제껏 빡빡한 자기 기준 안에 삶을 진심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어떤 이에게 이 모든 부스러기들은 행복에 닿기 어렵다는 나쁜 생각의 땔감이 되기도 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냉철해질수록, 내가 원하는 행복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선명해질수록 예민한 이들의 마음엔 부담과 슬픔이 함께 내려앉는다. 매사에 대개 둔감하고 너른 배포와 여유가 있어 삶을 긍정하고 그 모든 과정에 과도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이들 대비, 일상에서 소소하게 행복을 느낄 확률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예민하고 민감한 이들이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걸 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단서를 끊어 회사에 병가를 낼 수 있는 일일까? 공적인 인정은 아니더라도 술자리 어디라도 다수의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모두 아니다로 수렴한다. 그저 예민한 개인의 특질일 뿐 의사의 소견이나 처방전, 건강보험 혜택 어드매에 있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꽤 빈번하게 또 주기적으로 나의 머리맡을 찾아온다. 어느 정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털어놓기 어려운 무거운 생각을 끌어안고 잠을 청한다. 다수의 공감과 감정적 지지, 의료혜택을 볼 수 없다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틀렸다거나 스스로 사라지지 않기에, 우리의 밤은 유독 깊고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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