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이 곧 해답이자 빛이 되어버린 사회에게
통상 우리 사회에선 긍정적인 에너지, 낙천적인 마인드가 만물의 진리를 관통하는 매직 키워드로 작용한다. 진로, 취업, 관계 등등 인생 전반에 고민이 있다? 전문가의 솔루션 첫 번째는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 탑재다. 기분이 자꾸 다운되고 마음이 불편하다? 따뜻한 시야로 주위를 살피고 범사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긍정하란다. 이 치열한 사회에 나만 경쟁에서 도태되는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해둔 건 없는 것 같아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삶은 의미 있는 것이니 내일 더 나아질 거란 긍정적인 다짐으로 나를 토닥여주란다. 마냥 삐딱선을 타며 긍정의 에너지 자체를 무시하거나 사물과 현상의 좋은 점을 찾아내는 긍정의 솔루션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근데 어딘가 좀 무책임하단 생각이 들진 않는지 되묻고 싶다. 이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 ‘긍정’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가치가 역량인 동시에 곧 능력이란 사실을 배제하고 있단 점이다. 긍정하는 힘은 단순한 마인드나 애티튜드 그 이상의 능력치다. 태생이 밝고 긍정적이고 시련에 튼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엄청난 노력과 반복을 거듭해야 조금이라도 실천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사물을 꼬아보고 현상을 비관만 하는 것보다야 폭발력이 큰 것이 긍정성이지만 자의가 아닌 태생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너무도 당연하게 이를 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폭력이라고 본다. 너무 잘 알고,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지만 일상에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쉽지 않은 사람들도 있단 이야기다. 그게 꼭 나라서 이렇게 목 놓아 주창하는 것은 아니고(흠흠) 그니까 긍정하는 힘도 수학에 재능 있거나 체력이 좋거나 음감이 뛰어난 것처럼 한 사람의 재능이라는 관점을 인정해보잔 이야기다.
긍정하는 힘도 재능과 능력의 범주라는 것을 이해받지 못한 채 여러 명사들의 이야기나 베스트셀러, 멘토의 가르침, 회사의 인재상 등을 마주하다 보면 그 능력을 충분히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은 미세한, 그러나 날카로운 마음의 상처를 얻게 된다.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회 부적응자가 된 고립감을 느끼게 되거나 매일매일 치열하고 열심히인 나의 일상을 부정당하는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쳐서 마음을 터놓고 속내를 보였는데 대번 너는 너무 부정적인 것 같아, 좋게 좋게 생각하지 왜, 그렇게 예민하면 답도 없어 같은 류의 무신경한(상대는 악의 없이 진솔했다는 것이 더 슬픈 포인트다) 대답을 듣게 된다. 누군가에겐 아주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문제가 긍정력을 타고나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그저 일상적이고 별 거 아닌 문제로 치부되는 것이다. 긍정이 해답이고 빛이 되어버린 사회에선 이런 물음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긍정적이지 못한 나를 자책하고 이 방법 저 방법 통해 나의 ‘단점’을 고치려 노력한다. 그 노력과 시도는 분명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앞의 전제가 긍정은 무조건 당연한 거야, 긍정적이지 못한 네겐 문제가 있어가 아닌 긍정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고 대단한 거야로 아주 조금만, 몇 mm만 배려있는 이해가 전제된다면 그렇지 못하게 태어난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편안하지 않을까? 아니 손해날 것도 없지 않은가. 원래 긍정적인 사람들은 체력이나 지능, 재능처럼 하나의 능력치가 더해지니 기분 좋고 다소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지만 점차 이를 노력하려는 사람들에겐 말 못 할 좌절감이 아닌 건강한 목표나 지향점으로 '긍정력' 이 세팅되니 말이다.
긍정도 능력이다. 없으면 키우고 싶고 얻으면 삶이 윤택해지는.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바라봐주는 거다. 만병통치약처럼 기승전긍정을 외치며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결격자 필터로 거르고 보는 것이 아닌, 연습과 반복을 통해 획득 가능한 삶의 좋은 스킬로 말이다.